2020년 7월 27일 촬영한 북한 영변의 핵시설 단지 위성사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날 발간한 북핵 관련 9월 연례 이사회 보고서에서 영변 핵시설 내 5MW(메가와트) 원자로와 관련해 "2021년 7월 초부터 냉각수 방출을 포함해 원자로 가동과 일치하는 정황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플래닛 랩스-AP연합뉴스
 
2020년 7월 27일 촬영한 북한 영변의 핵시설 단지 위성사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날 발간한 북핵 관련 9월 연례 이사회 보고서에서 영변 핵시설 내 5MW(메가와트) 원자로와 관련해 "2021년 7월 초부터 냉각수 방출을 포함해 원자로 가동과 일치하는 정황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플래닛 랩스-AP연합뉴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13일(현지시각) 빈에서 열린 IAEA 이사회에서 “북한이 영변의 우라늄 농축 시설에서 냉각장치를 제거한 것으로 보이는 동향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이는 IAEA 최신 보고서에도 없는 내용으로, 최근까지 가동 중단 상태였던 우라늄 농축 공장을 다시 돌리려는 징후로 해석됐다.

앞서 IAEA는 지난달 말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영변에서 지난 7월 초부터 냉각수 방류가 포착됐으며 이는 2018년 12월 가동 중단된 5㎿ 원자로의 재가동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우라늄 농축 시설을 가동하면 고농축우라늄(HEU)을, 원자로를 돌려 나오는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둘 다 핵폭탄 원료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풀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이 같은 북한의 움직임에 대해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이어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지속하는 것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명백히 위반하는 행위로서 매우 유감스럽다”고 했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9월 13일(현지시각)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IAEA 이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영변 핵시설 원자로 재가동 조짐이 심각한 문제라면서 북한에 핵 활동 제한에 관한 국제적 의무 준수를 촉구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9월 13일(현지시각)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IAEA 이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영변 핵시설 원자로 재가동 조짐이 심각한 문제라면서 북한에 핵 활동 제한에 관한 국제적 의무 준수를 촉구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한국 정부는 14일 “대북 인도 협력이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며 관련 고시(告示)를 개정해 전국 모든 지방자치단체를 ‘대북지원사업자’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이날 국회에서 대북 제재 완화·유연화를 거론했다. 영변 핵시설 풀가동 소식 말고도 하루 전엔 북한이 기존 미사일 방어망을 피해 한국과 일본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신형 순항미사일의 개발 성공을 선언한 상황에서 유화 메시지만 발신한 것이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경보음이 연이틀 울렸는데 정부 어느 부처도 북에 대한 유감 표명은 고사하고 떡 줄 궁리만 하고 있다”고 했다.

통일부의 이번 고시 개정으로 광역 지자체 17곳과 기초 지자체 226곳은 별도의 신청 절차 없이 대북지원사업자로 일괄 지정됐다. 이 지자체들의 대북 지원 사업은 1조2400억원 규모의 남북협력기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대북 인도 사업 진행 입장에 변화가 없느냐’는 질문에 “정부는 그동안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한 인도주의 협력은 정치·군사적 상황과 별개로 중단 없이 추진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으며 이런 입장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이인영 장관도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인도주의 협력은 제재와 근본적으로 상충·충돌하는 과정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담대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제재 완화·유연화를 통해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오도록 촉진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런 기회를 가지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고도 했다.

전날 정의용 외교장관은 한·호주 외교·국방장관(2+2)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이 (6개월 만에) 재개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북한과의 대화, 관여, 외교가 시급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는 이날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한·미 협의에서도 대북 인도적 협력 사업, 북한과의 신뢰 구축 조치 등 북한을 관여시킬 다양한 방안이 논의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개발과 신형 미사일이 우리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정부의 대응이 지나치게 안이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패트리엇,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등 2중3중의 방어망을 구축해 놓은 탄도미사일과 달리 포복하듯 낮게 깔려 날아오는 순항미사일은 탐지 자체가 어려워 현재의 미사일 방어망으론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서욱 국방부 장관은 이날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북한이 순항미사일에 소형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느냐’는 국민의당 이태규 의원의 질문을 받고 “가능하다고 판단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정부가 이처럼 심각한 안보 위협에 눈을 감는 것은 임기 말 ‘평화쇼’에 대한 미련 때문으로 보인다. 외교 소식통은 “정부가 남·북·미 화해 무드 재가동의 계기로 기대를 걸었던 도쿄올림픽에 북한이 불참한 데 이어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도 북한의 참여가 불투명해지자 더 절박해진 것 같다”고 했다. 정부·여권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북한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한 뒤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정의용 장관도 이날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북한의 베이징올림픽 참가 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이번 순항미사일 발사에 쉬쉬하는 것도 ‘평창 어게인’의 불씨를 살리려면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란 지적이다.

외교 소식통은 “제대로 된 정부라면 북한의 신형 순항미사일 개발 성공에 ‘대화’보다 ‘제재 강화’를 먼저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북한담당 국장을 지낸 앤서니 루지에로 민주주의수호재단 선임연구원은 14일 미국의소리(VOA)방송에 “바이든 정부가 이번 순항미사일 발사에 대응해 임기 첫 대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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