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북한 주석 김일성 간에 이뤄질 뻔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회담 20여 일 앞두고 김일성이 급사하는 바람에 회담이 무산됐고 그래서 역사적 회동(會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1993년 2월 25일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하고 있다./조선일보 DB
 
1993년 2월 25일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그해 6월 평양을 방문해 남북 정상회담을 주선했고 김영삼이 이를 수락, 7월 25~27일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기로 남북 간에 합의됐다. 당시 한국의 일부 보수층은 대북 문제에 뚜렷한 이념적 접근을 보여주지 못했던 YS가 노련한 김일성을 만나 어떻게 남북 문제를 풀어갈지 약간은 걱정을 했다.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조선일보 DB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조선일보 DB

결국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김정일과 성사시켜 6·15 선언이 탄생했다. 애초 카터를 평양에 보내자고 제안한 사람이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인 DJ였던 만큼 ‘역사적 최초’의 공(功)이 그에게 돌아간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남북 정상회담은 DJ에 이어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2차가 있었고 이명박-박근혜를 건너뛰어 문재인 정권에서 3차로 이어졌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임기 끝나기 직전인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자신의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가질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역대의 남북 정상회담이 예외 없이 한국의 좌파 정권에서만 이뤄졌고 보수·우파 정권은 대북 문제를 반공(反共)적 차원에서만 다루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의 문제를 상기하고자 하는 이유에서다. 그런 연고로 대북 협상과 친북 노선은 좌파-운동권의 전유물이 돼 버렸다. 그리고 보수·우파를 필연적으로 반공, 반북으로 내몰고 결국 한국 내의 이념적 대립을 격화시켰다. 그뿐 아니라 그것으로 권력을 얻거나 유지하는 정치적 계산으로 발전해 나갔다. 대북 문제가 찬반 간에 권력 유지의 한 방편이 되고 도구가 된 상황이다.

남북이 그동안 단절됐던 남북 통신선을 복원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있었던 지난주 문재인 정부 또는 친여 섹터에서 보인 ‘격한 반응’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여권의 반응은 체통을 잃은, 아니 체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감읍 그 자체였다. 이러니 북한 입장에서는 남쪽의 좌파 정권을 자기들이 쉽게 다룰 수 있다는 식으로 만만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역대 좌파 정권도 나쁘게 진화했다. DJ 때는 그의 이념적 성향에 더해 ‘통일 대통령’으로서의 공명심이 크게 작용한 측면이 있다. 노무현 정부는 대북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파병 해군기지 FTA 등 자강(自强) 노력을 병행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체면 불고하고 완전히 북한의 하수인인 양 처신하고 있다. 북한이 무슨 욕을 해도, 무슨 요구를 해도 고개 숙이는 굴욕적 자세를 보이다가 기회가 오면 이번 통신선 복원 경우처럼 기뻐 환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남북 문제가 한국의 이념적 대결 구도로 발전하고 권력 유지의 도구로 변모하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남북 화해나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좌파는 안면몰수 식으로 북한 편들고 보수·우파는 ‘빨갱이 논리’에 집착하는 한, 남북의 실질적 진전은 어렵다. 더구나 좌파가 이런 상황을 대선 등 정치권력 유지에 이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남북 화해나 협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보수 우파 진영이 반대하고 거부하는 것은 남북 협력과 대북 지원이 아니다. 진정 두려운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한국을 북한에 예속시켜 북한이 한반도의 적통인 양, 북한 주도의 ‘고려연방공화국체제’로 끌고 가려는 공산화(共産化)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질주하는 세력들의 실체와 배후다. 사실 북한과의 평화 공존, 공동 번영 과제는 북한과 남쪽의 좌파가 합작할 때가 아닌, 한국의 보수 우파 정권과 북한 정권이 협력할 때 비로소 복합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또 그래야 남쪽의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지속 가능하다.

김영삼-김일성 회담 추진 당시 통일비서관을 지낸 정세현(현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씨는 지난 2015년 YS 추모 칼럼에서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렸다면 추진력 강한 YS가 임기 동안 남북 관계를 확실히 발전시켰을 것이고 DJ가 그 바탕 위에서 더욱 진전시켰을 것이며 노무현도 그 방향으로 나갔을 것이라고 말하고 “남북 관계 개선이 구조화됐더라면 (그 이후) 보수 성향 대통령도 그 흐름을 뒤집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그가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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