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위원장이 지난 3월25일 오후 서울 중구 진화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2기 1차 위원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뉴시스

정근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위원장이 지난 3월25일 오후 서울 중구 진화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2기 1차 위원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뉴시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 정근식 위원장이 6·25 때 북한·중공군에 붙잡혔던 국군 포로와의 면담에서 ‘거제도 수용소에 있던 중공군 포로의 피해에 관심이 많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25일 알려졌다. 면담에 동석한 북한인권단체 물망초는 “국군 포로들이 북한군과 중공군의 가혹행위와 관련한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갔다가 되레 중공군 포로 피해 이야기를 들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과거사위는 2005년 제정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법에 따라 출범한 국가기관이다.

탈북 국군 포로 김모(90)씨는 지난 24일 서울 중구 과거사위 사무실을 찾아가 정 위원장을 면담했다. 김씨가 이날 과거사위에 6·25 때 북한군·중공군에 붙잡혔는데 제네바협약에 따른 송환이 거부됐고 포로 수용 중에 가혹행위를 당한 것을 규명해달라는 신청서를 한모씨 등 다른 국군 포로 2명과 공동 명의로 제출한 직후였다. 한씨 등은 건강상의 이유로 진상규명 신청서만 제출하고 이날 면담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6·25전쟁 국군포로 김모(90)씨가 24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북한인권단체 물망초 측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6·25전쟁 국군포로 김모(90)씨가 24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북한인권단체 물망초 측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그런데 정 위원장은 면담에서 “저는 6·25 당시 거제도 수용소에 있던 중공군 포로의 피해에 관심이 많다. 이들을 만나 피해상을 조사해보려고도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물망초 측은 전했다. 북한군·중공군의 포로가 됐다가 탈출한 고령의 국군 포로 앞에서 국군과 미군에 잡혔던 중공군 포로 피해를 거론했다는 것이다.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은 “국군 포로 어르신이 면담 후 정 위원장의 ‘중공군’ 언급에 어이가 없어 하면서 정신적 충격을 호소했다”면서 정 위원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정 위원장은 본지 통화에서 “위원장으로서 말한 것이 아니라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원장 당시 중공군 포로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라면서 “남북 화해를 위해서는 중공군의 피해도 알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면담서 국군 포로분들에게는 신청서를 잘 검토해보겠다고 긍정적 말씀을 드렸다”고 했다.

◇귀환한 국군포로는 총 80명...이 중 18명 생존

1953년 정전협정 당시 유엔사는 북한군·중공군에 포로가 되거나 실종된 국군이 8만2000여명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은 포로 교환 과정에서 전체의 10분의 1정도인 8343명만을 송환하고서 “이제 포로는 없다”며 국군 포로 수만명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북한은 대신 이들을 탄광, 공장 등 전후(戰後) 복구 사업에 투입해 종신 노역을 시켰다. 제네바협약 제118조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북한은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귀환한 국군포로 1호 고 조창호 중위.

귀환한 국군포로 1호 고 조창호 중위.

1994년 조창호 소위(귀환 후 중위로 진급)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자력으로 북한을 탈출해 귀환했다. 이들 가운데 생존자는 이날 과거사위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제출한 김·한씨 등을 포함해 18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에는 300~500여명의 국군포로가 여전히 북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권 단체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국제사회와 연대해 국군포로 송환에 보다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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