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욱 국방부 장관이 2020년 9월 23일 서울 용산구 합참 연병장에서 열린 제41·42대 합참의장 이·취임식 및 전역식에서 원인철 합동참모본부의장에게 부대기를 수여하고 있다./국방부

서욱 국방부 장관이 2020년 9월 23일 서울 용산구 합참 연병장에서 열린 제41·42대 합참의장 이·취임식 및 전역식에서 원인철 합동참모본부의장에게 부대기를 수여하고 있다./국방부

서욱 국방부 장관은 최근 지난달 25일 북한의 탄도 미사일 발사 실험과 관련, 세 번째 보고를 받고 합참의 대응 지연 원인 등을 점검했다. 북한 미사일 도발 당시 서 장관은 아랍에미리트(UAE)와 인도를 순방 중이었다. 미사일 도발 직후 서 장관은 현지 보좌진으로부터 즉시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달 28일 귀국한 다음에도 관련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도 서 장관이 지난 5일 합참 박정환 작전본부장, 이영철 정보본부장에게 세 번째 관련 보고를 받은 것은 다소 이례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서 장관(육사 41기·1985년 임관)보다 1년 군(軍) 선배인 원인철 합참의장(공사 32기·1984년 임관)도 애초 참석 대상은 아니었지만 보고에 참석했다.

서 장관은 이날 보고에서 미사일 발사 시점 합참 공지가 지연된 점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당시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오전 7시6분과 7시25분쯤 탄도미사일 두 발을 잇달아 발사했다. 합참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사실을 첫 발사 뒤 19분이 지난 오전 7시25분에야 공지했다. 오전 7시9분쯤 일본 해상보안청의 발표보다도 16분 늦었던 셈이다.

합참은 당시 북한 미사일 도발과 관련 국방부 정례 브리핑에 나타나지 않아 논란을 빚기도 했다. 통상 북한 동향이나 군 작전과 관련한 사항은 합참이 브리핑하지만 그날은 합참 김준락 공보실장 등 관계자가 모두 불참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미사일이 맞는다’는 보도가 나오는 상황에서도 합참은 ‘발사체’ 표현을 당분간 유지하기도 했다. 합참은 일본 해상보안청이나 외신보다 4시간 이상 지체된 11시19분에야 ‘단거리 미사일’ 표현을 사용했다. 정치권에선 “북한 눈치 보기가 도를 넘었다” “우리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항을 왜 외신에서 먼저 접해야 하느냐” “합참의 공보 역량을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등 지적이 나왔다.

이와 관련, 서 장관은 합참의 대응 지연에 대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외부 변수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고 한다. 서 장관은 또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고도 20여㎞ 이하 ‘종말 단계’에서 제대로 탐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점검해봐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은 미사일 비행 거리를 600㎞로 발표했는데, 이는 한·일 당국이 발표한 450㎞보다 150㎞나 긴 것이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 합참이 정확한 발사 위치를 공개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군 안팎에선 서 장관이 같은 사안을 놓고 세 번이나 보고를 받은 것이 사실상 합참에 대한 ‘질책’ 성격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사실상 장관의 지휘권을 행사한 자리였다는 것이다. 보고 범위 역시 합참의 북한 감시 태세·역량, 공보 대응 지연 논란 등을 총망라했다는 점에서 1년 선배인 원 의장을 질타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잘못을 질책하는 차원의 보고가 아니라, 대응 미비점을 함께 논의하고 향후 개선점을 찾는 일종의 브레인 스토밍 회의에 가까웠다”며 “서 장관이 워낙에 ‘정밀 진단’과 ‘사후 강평’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원 의장 역시 해당 보고 자리가 합참에 대한 ‘질책성’이었다는 일부 시각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 장관도 “그날 보고는 결코 합참에 대한 질책이 아니었다”고 주변에 이야기했다고 한다. 원 의장은 과거 합참차장 시절 휘하 작전본부장이었던 서 장관 상관(上官)이었다. 1년 후배인 서 장관이 지난해 육군참모총장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영전하면서 서열이 역전됐다. 지난해 원 의장 지명 때도 ‘기수 파괴’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군 관계자는 “서 장관이 원 의장을 매우 존중하고 있으며, 원 의장도 서 장관을 상관으로 깍듯이 예우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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