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源一
/소설가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간 아버지의 별세 기일을 알아내고 그쪽에서 결혼한 가족을 만날까 하고 방문단 일원에 끼어 2박3일 일정으로 금강산에 다녀왔다. 봄 가뭄을 달래며 내내 비가 내렸다. 그 단비가 왠지 내게는 이산가족 만남의 기쁜 눈물이 아니라 전쟁 전후 헤어진 채 50년 넘게 만나지 못하고 있는 1000만 이산가족의 눈물과 이승에서 상봉하지 못한 채 무주고혼이 된 영혼들의 맺힌 한이 눈물이 되어 마른 땅을 적시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4월 30일 오전 11시, 마지막 작별의 만남이 끝나고 가랑비 속에 버스에 오른 남측 방문단을 두고 통일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는 북측 가족의 훈련된 장면에서 나는 이 민족의 슬픔을 넘어, 분노의 눈물을 닦았다. 1년2개월 만에 힘들게 재개된 200명의 만남은 전쟁 전후 북에서 피란 나온 가족이 주축을 이룬 방문신청자 11만7000명 중 일원이고, 나처럼 월북자 가족을 합친다면 또 그만한 숫자는 더 있을 터인데 극소수가 선택된 ‘반짝 만남’의 이벤트성 행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울분이었다. 남북당국자는 민족의 숙원을 왜 이 정도밖에 풀어주지 못하는 못난이들인가 하는 자괴감도 함께 작용했다.

먼저 남북한 당국은 이산가족 전체 명단을 쌍방이 교환하여 생사문제, 거주지 확인부터 통보해 줌이 선결문제이다. 다음 단계로 자유로운 서신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체제의 현실적 조건을 사신을 통해 선전하는 게 문제가 된다면, 설문조사식의 일정한 양식을 만들어 공개 가능한 특별엽서로 상호교환이 가능할 것이다.

이번 방문단도 99명 중 부부상봉·자녀상봉보다 형제·조카 상봉 수가 훨씬 많았음을 볼 때 ‘한 다리가 천리’란 속담대로 추첨 선별의 비합리성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서신교환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남북적십자사는 이를 토대로 고령자, 부부와 친자 만남부터 우선 순위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면회소 설치의 화급성이다. 교통이 편리한 판문점 부근에 상설 대형 면회소를 만들 필요성이 있다. 면회신청을 하면 면회소 운영측이 이를 양쪽 가족에게 통보하여 쌍방 면회일을 알려주면 그 날짜에 맞추어 소풍 가듯 면회장으로 나가면 된다.

이번 1차 방문단은 북측이 두 차례에 걸쳐 남측의 이산가족, 지원단, 기자단을 합쳐 200여명을 초청해 식사대접을 해주었고, 2차 상봉단은 남측이 북측을 초대하는 형식이다. 한끼 식사비용이 개인당 50달러 정도로 추산되는데, 금강산까지 이동 비용을 합쳐 양측 부담이 만만찮다. 북측은 공동으로 마련한 간소한 선물을 남측에 주었으나 남측은 적십자사가 준비한 개당 30만원 상당의 생필품과 개인이 별도로 지참한 선물을 마련했다. 그 부담 역시 쌍방 서민경제 실정으로는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면회소가 설치되면 입대 장정 훈련병을 면회 가듯, 서로가 김밥이나 통닭 정도 싸들고 가서 부담 없이 한두 시간 서로의 가족 안부를 물으며 담소를 나눌 수 있다. 면회시간이 끝나면 다음 면회날을 기약하며(1년 1회 정도) 헤어지는 자연스러운 풍경 속에 민족공동체의 훈훈한 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쉽지만 실행에는 난관이 많다는 점도 알고 있다. 국제적십자정신 위에 군림하는 국제정치 상황의 가변성, 남북 정치현실의 유동성, 남북한이 처한 경제적 갈등, 쌍방 자존심의 알력 등 많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2차 대전 종결 이후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공멸이 아닌 공존을 통한 평화적 통일 열망만은 남북한이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민족공동체로서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은 이산가족문제 해결부터 원만히 풀어가야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이산가족 문제는 아직도 1000명 이내의 소수만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선에서 머물고 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노인이 영원한 노인으로 이 지상에서 머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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