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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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별세한 국군포로 이기춘(90)씨가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이씨는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여름 국군에 입대, 카투사(KATUSA·미군에 증원된 한국군)로 참전했다. 미2사단 38연대 K중대 소총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겨울 평안남도 개천군 인근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당시 19세였다. 북한에 인계된 고인은 정전 당시 포로 교환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청진건설사업소, 청진제철소 등에서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강제 노역을 했다. 그는 북한에서 54년간 국군포로로 지내면서도 고향 부산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2004년 11월 두 번 실패 끝에 세 번째 탈북을 감행, 한국에 무사히 입국했다. 73세였다.

고인은 이후 아내와 딸, 사위, 외손주 등 북한에서 함께 살던 일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2005년 6월엔 아내, 같은 해 9월엔 둘째 딸과 사위가 각각 입국했다. 2005년 12월엔 외손자 1명이, 2006년 1월엔 막내딸과 또 다른 외손자 1명이 탈북, 2006년 3월 이씨와 상봉했다. 3대(代) 가족·친척 7명이 5차례에 걸쳐 감행한 ‘릴레이 대탈출’은 2006년 3월 마무리됐다. 고인의 탈북 후 17개월 동안 이뤄진 일이었다. 당시 이씨는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며 “북한에 남겨둔 딸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아내가 살아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2005년 탈북했던 아내는 같은 해 11월 경남 김해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탈북 이후 고향 부산에 정착한 이씨는 2008년 부산 유엔공원 카투사 전우들의 묘를 찾았다. 그는 “함께 싸우다 돌아가신 전우들이여, 이 몸이 북녘에 살아돌아와 이제야 고개를 숙인다”고 했었다. 고인은 매년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카투사 묘역을 참배했다. 그는 생전 “생의 대부분을 북한에서 살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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