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정치권과 관가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번 개각 대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외교부 주변에선 현 정부 ‘원년 멤버’인 강 장관이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5년 임기를 채울 것이란 의미에서 ‘오(五)경화’라는 말까지 돌았다. 이 같은 예상을 깨고 강 장관이 교체된 배경을 두고 외교가에선 “지난달 북한 김여정의 비난 담화가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은 지난달 9일 담화에서 강 장관을 콕 집어 “북남 관계에 더더욱 스산한 냉기를 불어오고 싶어 몸살을 앓는다”며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여정은 강 장관이 같은 달 5일 바레인에서 열린 국제회의 때 “코로나로 인한 도전이 북한을 더욱 북한답게 만들었다”고 말한 것을 트집 잡아 “주제넘은 망언” “정확히 계산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6월에는 ‘김여정 담화’의 여파 속에 통일·국방장관이 잇따라 물러났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김여정의 6월 담화 2주 뒤 “남북 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밝혔고, 정경두 전 국방부 장관도 같은 달 김여정의 지휘를 받는 김영철 당중앙위 부위원장의 비난 담화 2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에서 김여정(왼쪽)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KBS화면 캡처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에서 김여정(왼쪽)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KBS화면 캡처

하지만 김여정의 12월 담화에도 불구하고 “강 장관의 입지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란 관측에 더 무게가 실렸다. 강 장관이 문재인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김여정이 문재인 정부의 인사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 장관을 바로 교체할 가능성을 작게 봤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여정 담화 한 달여 만에 강 장관이 교체되자 관가에선 ‘김여정에게 찍히면 무사하기 어렵다’는 의미의 ‘김여정 데스노트’란 말이 돌기 시작했다. 여권 관계자는 “코로나 방역과 백신 등을 고리로 남북 협력 재개를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로선 김여정이 실명 비난한 강 장관의 거취를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외교부 차관을 지낸 국민의힘 조태용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오경화도 김여정 말 한마디에 무너졌다”며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장관 인사는 북한의 입을 쳐다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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