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에 대해 다른 어떤 논리적인 글보다도 내가 겪은 유사한, 그리고 아픈 우리 가족사를 쓰고자 한다. 민족이 달라도, 핏줄이 강제로 이별했다 다시 만나는 아픔과 애절함은 온세상이 다 같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체코슬로바키아인이다. 프라하의 일류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 지도자로 이름이 높은 강인하고 자기 주장에 굽힘이 없는 분이었다. 그러던 중 1948년 공산혁명으로 구소련군이 체코를 점령, 민주주의 희망은 갑자기 사라졌다. 친미주의자였던 아버지는 곧바로 반동으로 몰려 감옥에 들어갔다. 아버지를 고발한 배신자는 같이 운동을 하던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아버지의 심적 고통은 더욱 컸다.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던 아버지는 10년 만에 바닥에 구멍을 파 얼은 강을 헤엄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코에 더이상 남아있을 수 없었고, 조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미국에서 새 인생을 개척했다. 아버지는 본래 강인한데다 생사를 건 감옥 탈출 이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어 억척같이 공부해 명문 컬럼비아대를 졸업했다. 인도에서 공산주의에 관한 책을 집필하던 중 출판사에서 일하던 어머니와 결혼해 싱가포르로 갔고, 거기서 나를 낳았다. 1970년대 우리 가족은 캐나다에 정착했다.

그때쯤 체코 정부는 할머니가 아버지와 다시 상봉할 수 있게 마침내 허가를 내 주었다. 할아버지는 수년전 돌아가신 상황이었다. 나로서는 최초로 할머니와 만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별의 아픔을 안은 채 늙어 있었다. 영어를 하지 못해 나와는 직접 대화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줄 선물이라며 조그마한 광부용 램프를 건넸다. 아버지가 강제노동을 하던 당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는 안타까움에 사 놓았던 것이었다. 할머니가 다시 체코로 돌아갈 때 나와 내 동생은 공항에서 울음을 참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마음속 깊이 삭이며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다.

이런 내 경험이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첫째, 아버지처럼 강건한 분도 결국 가슴속 깊은 응어리를 감추지 못한 채,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에 위로를 받고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았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한 몸인 가족들로부터 사랑받으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헤어져 살기를 바랄 사람은 결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면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통일로 향하는 큰 디딤돌이 되리라 믿는다. 유럽의 경우 가족간의 상봉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기반이 됐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인생과 나라 역사에 대해 나와 비슷한 교훈을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북한이 지난 1985년처럼 소규모 상봉 이후 다시 움츠러드는 행태를 보이지 말고 계속 유지시켜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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