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심야 열병식에서 사열하는 김정은과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연합뉴스,조선일보DB
지난 1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심야 열병식에서 사열하는 김정은과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연합뉴스,조선일보DB

북한은 지난 14일 저녁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제8차 노동당 당대회 마무리 행사로 열병식을 개최했다. 지난해 10월 당 창건 75주년 기념일 열병식에 이어 두 번째로 ‘심야 열병식’을 연 것이다. 북한의 심야 열병식은 지난해가 최초였다. 당시 김정은은 10일 0시부터 인민군을 사열했는데 3개월 만에 또 밤에 열병식을 치른 것이다.

정부와 군 당국에선 심야 열병식이 북한 행사의 새로운 ‘코드’가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지난해 김정은이 심야 열병식에 몹시 흡족해했던 까닭에 3개월 만에 다시 밤에 열병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정은은 지난해 열병식 전 “열병식을 특색 있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작년 심야 열병식에 흡족해한 듯

정부 관계자는 “북한은 지난해 심야 열병식이 안팎으로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뒀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화려한 조명이 감싸는’ 평양 시가지를 무대로 정예 부대의 높은 사기, 첨단 무기를 과시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우리의 국력이 굳건하다’는 메시지를 주고, 대외적으로는 ’북한이 더는 낙후된 국가가 아니다’는 의도를 전달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보통 각종 기념일에 열병식을 열 때 오전 10시에 행사를 시작했다. 밤에 시작하는 심야 열병식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지난 14일 열병식이 열렸던 오후 6~7시 평양 최저 기온은 영하 8도였다. 예행 연습이 있었다고 알려진 지난 10일도 영하 16도를 기록했다. 체감 기온이 영하 10~20도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심야 열병식을 강행한 것이다.

군 당국과 전문가들은 밤에 행사를 열 경우 조명과 음악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북한 당국이 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좀더 근본적인 분석도 있다. ‘밤’ ’어둠’은 종교나 문학에서 악(惡), 혼돈, 타락, 무질서 등을 상징한다. 이와 반대되는 ’낮' ‘해’ ‘빛’은 선(善), 질서, 구원, 이상 등을 나타낸다. 장기적인 제재와 경제난을 겪는 북한 당국이 주민들의 결속을 높이고 김정은의 지도자적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심야 열병식’을 택한 건 자연스럽다는 분석이다. 실제 북한 체제에서 ‘태양’은 ‘위대한 수령’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난 14일 북한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심사 열병식(위)과 1930년대 나치 독일의 베를린 파리저 광장에서 열린 야간 행사 모습./조선일보DB
지난 14일 북한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심사 열병식(위)과 1930년대 나치 독일의 베를린 파리저 광장에서 열린 야간 행사 모습./조선일보DB

◇야간 행사를 선호했던 나치 히틀러

심리학적·뇌과학적으로도 인간은 낮보다는 밤에 훨씬 감정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밤에는 감정을 전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분비량이 줄어든다. 이 때문에 우울, 불안의 강도가 낮보다 높다. 또 밤엔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분비가 촉진되면서 나른함과 몽롱함이 더해지고 감정적인 진폭도 높아진다. 한 이벤트 전문가는 “과거 각종 수련회의 ’캠프파이어’ 행사나 교회 기도회 등 종교 행사를 심야에 여는 이유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한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동덕여대 송희영 교수는 논문 ’히틀러의 연설, 열광과 도취의 도가니’(2017)에서 “히틀러의 연설은 주로 오전 시간대보다는 저녁 시간에 이뤄진다”며 “이는 대중의 판단력과 비판력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오전보다는 저녁을 활용함으로써 히틀러의 연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하려는 취지”라고 했다.

 

실제 나치 독일은 베를린 파리저 광장 등에서 횃불이나 전기 조명 등을 활용한 군중 집회를 자주 개최했다. 김 교수는 “육체적으로 지쳐 있는 관중은 몽롱한 상태에서 히틀러를 맞이하게 된다”며 “여기에 덧붙여 횃불과 캠프파이어, 서치라이트 등의 웅장한 불빛과 부대장치들이 가세한다”고 했다. 북한의 지난해, 올해 열병식에서도 8000명~1만3000명 행사 참가자들이 혹독한 리허설 끝에 김정은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히틀러를 우러러본 나치 독일 구성원들과 비슷한 심리였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보관된 금수산태양궁전을 배경으로 북한 열병식이 치러지는 모습(위). 1933년 독일 나치당 대회에서 대공 조명으로 연출된 '빛의 대성당' 퍼포먼스./조선일보DB
지난해 10월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보관된 금수산태양궁전을 배경으로 북한 열병식이 치러지는 모습(위). 1933년 독일 나치당 대회에서 대공 조명으로 연출된 '빛의 대성당' 퍼포먼스./조선일보DB

◇“北열병식 조명·촬영 구도, 나치와 비슷”

군 당국과 전문가들은 북한의 선전·선동 책임자들이 나치 독일의 선례를 일정 부분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1933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대회에서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는 심야에 152개 방공 조명을 12m 간격으로 배치, 밤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쏘아 올리는 ‘리히트돔’(Lichtdom)을 연출했다. ‘빛의 대성당’이라는 뜻의 이 퍼포먼스는 20세기 프로파간다 중 가장 효과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북한은 지난해 심야 열병식에서도 김일성·김정일 시신을 보관 중인 금수산태양궁전을 향해 비슷한 구도의 조명 연출을 했다.

북한의 지난해 심야 열병식 연출 기법과 촬영 구도 등에 대해서도 방송계 등에선 “장기간 연출에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하다”고 했다. 특히 1934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의지의 승리'(1935)와도 연출 기법 면에서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이 영화는 심야의 군중 집회, 횃불 행렬 등을 웅장하게 묘사한다. 최종 무대에 등장하는 히틀러를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포착, ‘총통(Führer)의 위대한 면모’를 강조하는 점 역시 김정은에 대한 연출과 유사하다.

야간 조명을 비춘 평양 번화가(왼쪽)과 낮에 촬영한 평양 도심의 모습./조선일보DB
야간 조명을 비춘 평양 번화가(왼쪽)과 낮에 촬영한 평양 도심의 모습./조선일보DB

◇낙후된 민낯 감추려 조명발 동원 가능성

군 안팎에선 북한이 심야 열병식을 여는 이유에 대해선 군사적·실용적 목적도 거론하고 있다. 한미 감시 자산이 북한의 주요 무기 시설에 대해 실시간 추적을 하는 상황에서, 주요 무기의 이동 경로를 감추기엔 낮보다는 밤이 전술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다. 또 한미가 열병식에 공개되는 무기의 세부 제원을 파악할 때, 주간에 촬영한 사진이 야간에 촬영한 것보다 분석이 용이하다는 점도 감안했다는 것이다.

평양의 대외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행사 시간을 야간으로 택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 열병식 행사 영상을 보면, 북한 당국은 ‘화려한 조명이 평양을 감싸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아무리 평양이 북한의 최고 도시라 한들, 서울의 번화가와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다”며 “밤에 ‘조명발’을 한껏 내면서 낙후된 모습을 감추려 한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평양의 민낯을 분식(粉飾)하기 위해 밤 시간을 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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