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용수' 우수기씨의 묘. 고인은 국군 병사였지만, '특진' 예우로 묘에 하사 계급장을 달았다.  /조선일보 DB
 
'귀환용수' 우수기씨의 묘. 고인은 국군 병사였지만, '특진' 예우로 묘에 하사 계급장을 달았다. /조선일보 DB

인민군에 붙잡힌 지 58년 만인 2008년 북한을 탈출해 귀환한 국군 포로 우수기(88)씨가 지난 6일 울산 한 요양원에서 별세한 사실이 10일 뒤늦게 알려졌다. 그의 장례식은 대구의 군 병원에서 치러졌으며, 안장식은 지난 8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엄수됐다. 유족과 6·25국군포로가족회 등이 자리를 지켰다. 이로써 우씨까지 올해 4명이 타계해 탈북 ‘귀환 용사’는 전체 80명 가운데 20명이 됐다.

1932년생인 우씨는 1950년 6·25전쟁 발발 초기 국군 병사로 싸우다 포로로 잡혔다. 정전협정 당시 일부 포로 교환이 있었지만 북한은 “이제 포로는 없다”며 국군 포로 수만명을 돌려보내지 않고 이들을 전후(戰後) 복구 사업에 투입했다. 우씨도 이 중 하나였다.

정전협정 발효에 따라 1953년 7월 28일 처음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첫 회의에서 유엔군 사령관인 블랙시어 브라이언 소장과 북한 인민군 이상초 중장이 서로 신임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소장 오른쪽(사진 왼쪽)은 중국의 팅쿼조 장군, 그 옆은 차이쳉웬 장군.
정전협정 발효에 따라 1953년 7월 28일 처음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첫 회의에서 유엔군 사령관인 블랙시어 브라이언 소장과 북한 인민군 이상초 중장이 서로 신임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소장 오른쪽(사진 왼쪽)은 중국의 팅쿼조 장군, 그 옆은 차이쳉웬 장군.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 최종 보고서를 보면, 북한은 억류한 국군 포로를 북한 최북단 탄광·공장·농촌으로 보냈다. 종신 강제 노역이었다. 포로가 될 당시 열여덟이던 우씨도 2008년 탈북에 성공하기 전까지 60여년 대부분을 탄광에서 강제 노역했다. 사선(死線)을 넘어 대한민국 땅에 도착, 자유를 찾았을 때 그의 나이 일흔여섯이었다. 뒤늦게 전역식도 치렀다.

국군포로회 관계자는 “현재 한국에 남은 귀환 용사 대부분이 고령”이라면서 “정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이들을 위해 좀 더 관심을 갖고 예우를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재 북한에는 국군 포로 20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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