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 되면 가고 싶은 북한 여행지를 골라 봅시다’. 김일성 광장, 주체사상탑, 금수산 기념궁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평양지하철, 비무장지대(DMZ) 판문점.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1학년들에게 원격수업 참고 자료로 북한의 김일성 가계 우상화와 체제 선전 장소들을 북한의 대표적 여행지로 제시해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있다.

대구교육청이 지난 9월 제작했다가 삭제한 초등 1학년 학습 꾸러미. 삭제된 내용이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배부돼 논란이 됐다. /대구교육청
 
대구교육청이 지난 9월 제작했다가 삭제한 초등 1학년 학습 꾸러미. 삭제된 내용이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배부돼 논란이 됐다. /대구교육청

◇초등 참고 자료에 북한 선전 장소

10일 교육계에 따르면, 이 학습 참고 자료는 ‘통일되면 가고 싶은 여행지를 골라 붙여 봅시다’라는 제목이 달렸다. 1학년 교과서인 ‘겨울’의 한 단원인 ‘여기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이다.

보기로 제시한 6곳 가운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엔 ‘조국해방전쟁은 북한에서 칭하는 한국전쟁을 말합니다’란 설명이 달렸고, 주체사상탑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 김일성 광장은 ‘세계에서 16번째로 큰 광장’, 금수산 기념궁전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건물’ 등으로 소개됐다. 최근 부모들이 학교에 항의하자 학교는 “1학년 학습 내용과 수준에 적절치 않은 예시가 포함돼 있으니 학습하지 말고 삭제해달라”고 공지했다.

◇통일부 블로그 내용 그대로 사용

이 보조 자료는 지난 9월 대구교육청에서 1학년 원격수업 보조 자료로 만들었다가 수정 조치했던 자료가 발단이다. 교육청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묘향산·금강산·공민왕릉·백두산·박연폭포 등으로 수정해 대구 지역 학교에 보냈는데, 교사들이 수정 전 자료를 전국 초등학교 교사 74%(14만명)가 가입한 커뮤니티에 공유했다. 이를 내려받은 교사들이 이달 해당 단원 진도를 나갈 때 보조 자료로 쓴 것이다.

 

교육청 자료를 만든 교사는 “저작권 문제 때문에 정부 부처 자료를 찾다가 통일부 블로그에서 관련 내용을 발견해 참고했다”고 했다. 대구교육청은 “코로나로 인한 원격수업 상황에서 가정학습에 도움을 주려고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만들다 보니 내용을 일일이 살피지 못했다”며 “문제를 발견하자마자 수정했는데 이전 자료가 다른 지역에서 쓰일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고 했다.

통일부 블로그 자료는 ‘외국인이 꼽은 북한 관광지 톱 10’이란 제목으로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이 쓴 글이었다. 여기서 사진과 글을 여과 없이 가져다 그대로 학습 자료로 쓴 것이다. 통일부 블로그엔 ‘통일부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다’는 안내가 달려 있다.

문제가 된 초등학교에서 이 자료를 학생에게 배포한 교사는 “자료를 교사 커뮤니티에서 내려받았고 출처가 교육청과 통일부여서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명 서울시의원은 “다수 학교에서 이 자료를 나눠준 것으로 추정된다”며 “교육부와 교육청이 실태 조사를 벌여 이 자료를 쓴 학교들을 확인하고,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성호 중앙대 교수는 “사고력과 판단력이 성숙하지 않은 초등 1학년 학생들은 북한 체제 선전과 다름없는 내용을 그냥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전국 초·중·고교에서 통일 관련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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