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9일 대남 담화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최근 발언에 대해 “주제 넘은 망언”이라며 “두고두고 기억하고 정확히 계산하겠다”고 비난했다. 김여정의 대남 담화는 지난 6월 탈북 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문제 삼아 협박성 담화를 낸 지 6개월 만이다.

김여정은 담화에서 “우리의 비상 방역 조치들에 대하여 주제 넘는 평을 하며 내뱉은 말들을 보도를 통해 들었다”며 “앞뒤 계산도 없이 망언을 하는 것을 보면 얼어붙은 북남 관계에 더더욱 스산한 냉기를 불어오고 싶어 몸살을 앓는 모양”이라고 했다고 이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여정이 문제 삼은 강 장관의 발언은 지난 5일 바레인에서 열린 국제 안보 포럼 ‘마나마 대화’ 때 나온 것이다. 당시 강 장관은 “북한이 코로나 확진자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믿기 어렵다”며 “코로나가 북한을 더 북한답게 만들었다”고 했다.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북한 사회의 폐쇄성이 더 심각해진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정은 등 북한 지도부가 자신들의 코로나 방역 노력을 무시·조롱했다고 여기고, 김여정 담화를 통해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발신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의 이례적 반발에 청와대와 외교부, 통일부는 북한의 추가 조치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여권에선 문재인 정부 최장수 각료로 임기 5년을 채울 것으로 예상돼 온 강 장관의 거취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은 지난 6월 대북 전단을 강하게 비난하다 개성의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초강수를 뒀다.

전문가들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대북 제재가 강화되자 남측을 압박해 미국을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교 소식통은 “김여정 담화엔 ‘북에 유리한 대외 환경 조성을 위해 남조선이 더욱 분발하라’는 의미가 녹아있다”고 했다.

北, 통일·국방 이어 외교장관 거취까지 압박

지난 6월 탈북 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맹비난하는 담화로 남북 관계를 요동치게 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이번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정조준했다. ‘6월 담화’의 여파 속에서 잇따라 물러난 통일·국방장관에 이어 외교장관까지 교체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북한이 조 바이든 당선인의 대선 승리 후 미국 비난을 극도로 자제하는 가운데 대남 비난을 재개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다정했던 김여정·강경화 - 2018년 4월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 당시 김여정(왼쪽)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웃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9일 김 부부장이 강 장관 발언을 두고“망언”이라고 비난한 것과 상반되는 모습이다. /KBS
 
다정했던 김여정·강경화 - 2018년 4월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 당시 김여정(왼쪽)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웃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9일 김 부부장이 강 장관 발언을 두고“망언”이라고 비난한 것과 상반되는 모습이다. /KBS

김여정은 강 장관이 지난 5일 바레인에서 열린 국제 회의 때 “코로나로 인한 도전이 북한을 더욱 북한답게 만들었다”고 말한 것을 트집 잡았다. 코로나 국면에서 극심해진 북한 사회의 폐쇄성을 지적한 이 말에 대해 김여정은 “주제넘은 망언”이라며 “정확히 계산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계산한다’는 말은 ‘잘잘못을 가려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뜻이다. 북한 고위 외교관 출신인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은 본지 통화에서 이번 담화에 대해 “(북한이) 대북 전단 금지법 개정이라는 입법권에 이어 인사권까지 개입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와 여권은 2018년 평창올림픽 당시 우리 정부 고위 인사들과 두루 교분을 쌓은 북한의 2인자가, 문재인 대통령이 아끼는 것으로 알려진 강 장관을 ‘실명 비난’한 사실에 당혹스러운 모습이다. 강 장관이 지난 4일 개각에서 살아남자 외교부 안팎에선 ‘강 장관이 5년 임기를 채울 것’이란 의미의 ‘오(五)경화’ ‘K5(K는 강 장관 성의 영문 머리글자)’라는 말이 돌았다.

앞서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김여정의 6월 담화 2주 뒤 “남북 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밝혔고, 정경두 전 국방부 장관도 같은 달 김여정의 지휘를 받는 김영철 당중앙위 부위원장의 비난 담화 2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이날 김여정 담화로 후속 개각에 관심이 쏠린다. 강 장관 후임으로는 남관표 주일 대사 등이 거론된다.

김여정, 강경화 발언
 
김여정, 강경화 발언

북한은 종종 우리 정부 인사들의 언행을 트집 잡아 각종 담화·성명을 발표하지만 ‘백두 혈통’이 직접 나선 전례는 찾기 어렵다. 북한은 강 장관의 발언을 ‘최고 존엄’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은 고강도 제재 속에서 유일한 ‘경제 젖줄’인 중국과의 교역 중단도 불사하며 국경을 완전 봉쇄하는 등 코로나 유입을 막기 위해 과도할 정도의 방역 정책을 쓰고 있다. 이런 흐름은 김정은·김여정 남매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북한은 강 장관이 이런 자기들의 노력을 무시·조롱했다고 여기는 듯하다”고 했다.

다만 김여정의 이날 담화는 지난 6월보단 비난 수위가 낮다. 6월 담화는 북한 전(全) 주민이 보는 노동신문 등 모든 북한 매체가 보도했지만, 이번 담화는 대외 매체인 조선중앙통신만 보도했다. 대대적인 ‘남조선 때리기’ 여론몰이 상황은 아닌 것이다. 또 6월 담화는 “주인(한국 정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때”라며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협박·비난을 쏟아냈지만 이번 담화는 강 장관만 겨냥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김여정 담화를 방한 중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과 강 장관의 만남(11일)을 앞두고 발표한 점을 주목한다. 비건 부장관은 미 정권 이양기 한반도 상황 관리를 총괄하고 있다. 김형석 전 통일부 차관은 “(북한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방향을 놓고 불안감이 큰 상황에서 우리 정부를 향해 ‘미국 편에 서지 말고 북한을 위해 분발하라’는 메시지를 발신했다”고 했다.

국정원에 따르면, 북한은 미 대선 이후 해외 공관에 ‘미국을 자극하는 대응을 하지 말라’ ‘극도로 발언에 신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음 달 출범할 바이든 행정부를 자극하지 않으려 각별히 입단속을 한다는 것이다. 고위 탈북자 A씨는 “미국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만만한 남조선에만 역정을 낸다”고 했다. 앞서 북한은 지난 10월 미국을 다녀온 서훈 국가안보실장에 대해서도 ‘미국산 삽살개’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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