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북한 주민에게 뚫린 전방 철책은 2012년 북한군 병사의 ‘노크 귀순’ 사건이 벌어진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있다. 군(軍)은 당시 노크 귀순 사건으로 경계 실패에 대한 질타가 커지자 GOP(일반전초) 과학화 경계 시스템을 구축해 경계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8년 만에 다시 북한 주민에게 철책이 뚫린 과정에서 경계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철책에 설치된 동작 감시 센서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군 당국이 열상감시장비(TOD)로 북한 주민이 철책을 넘는 장면을 포착하고도 14시간이 넘도록 신병을 확보하지 못해 경계 해이 논란도 일고 있다.

군 병력들이 4일 강원도 동부 전선의 군사분계선(MDL) 철책을 넘어온 북한 남성에 대한 수색 작전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고 있다. 이 남성은 14시간여 만에 민통선 지역에서 군에 발견됐다. /연합뉴스
군 병력들이 4일 강원도 동부 전선의 군사분계선(MDL) 철책을 넘어온 북한 남성에 대한 수색 작전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고 있다. 이 남성은 14시간여 만에 민통선 지역에서 군에 발견됐다. /연합뉴스

군은 이날 브리핑에서 “지난 2일 오후 10시 14분쯤 아군 GP(감시소초) 감시 장비로 군사분계선(MDL) 일대 신원 미상 인원을 두 차례 포착했다”며 “이에 따라 우리 군은 다양한 우발 상황에 대비, 정보 감시 형태를 격상해 DMZ(비무장지대) 수색 작전을 강화하고 비상주 GP에 병력을 투입하는 등 감시를 강화했다”고 했다. 사전 징후를 포착하고 감시·경계 태세를 강화했지만 민간인이 철책을 넘는 걸 막지 못한 것이다.

군은 3일 오후 7시 25분쯤 TOD로 북한 주민이 철책을 넘어오는 장면을 지켜봤다고 한다. 하지만 철책을 넘어온 북한 주민의 신병 확보에는 실패했다. 이에 따라 대침투 경계령인 ‘진돗개’를 발령했다. 군은 평소 ‘진돗개 셋’을 유지하다가 북한군의 침투가 예상되면 ‘둘’로 격상하고, 적의 침투 흔적과 대공 용의점이 확실하다고 판단될 때 ‘하나’로 올린다. 군은 이번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이 북한 주민 신병을 확보한 건 4일 오전 9시 56분쯤. 우리 군 GOP 철책 남쪽 1.5㎞ 지점이었다. 민간인 출입통제선은 넘지 않았지만 우리 측 지역을 14시간 30분 동안 아무런 제지 없이 활보한 것이다.

군은 그동안 전방 철책 등에 설치된 과학화 경계 시스템의 보안성을 자신해왔다. 작년 아프리카 돼지 열병 발병 당시 군은 북측에서 감염된 멧돼지가 넘어올 가능성에 대해 “멧돼지가 전방 철책을 뚫을 수 없다”고 장담했다. 멧돼지든 사람이든 쉽게 뚫을 수 없고 월경 시도 시 우리 경계 시스템을 통해 적시에 포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북한 민간인이 철책을 넘어 우리 측 지역을 버젓이 돌아다닌 사건이 발생하면서 보안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전문연구위원은 “결과적으로 과학화 경계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라며 “군 당국이 귀순자가 철책을 넘어오는 것을 보고도 유도 작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경계 태세에 총체적 부실이 드러난 셈”이라고 했다.

 

현 정부 들어 경계 실패 사례가 거듭되고 있다는 점에서 군의 기강 해이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 7월 탈북민 김모씨가 강원도 해안 철책 밑 배수로를 통해 월북했지만, 군은 북한이 김씨 월북 사실을 보도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올 3월에는 제주해군기지에 민간인이 철조망을 뜯고 무단 침입해 1시간 가까이 군의 제지를 받지 않고 기지를 돌아다녔다. 작년 6월에는 북한 주민들이 어선을 타고 강원도 삼척항에 아무런 제지 없이 ‘입항 귀순’하는 일도 벌어졌다. 군은 당시 삼척항에 정박한 북한 선박을 발견한 주민들이 신고하기 전까지 이런 사실을 몰랐다.

한편, 군과 정보 당국에 따르면 월책한 북한 주민은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귀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매뉴얼에 따라 신원을 파악하고 귀순 의사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처음엔 제대로 대답을 못하다가 나중에 귀순 의사를 밝혔다”며 “복장은 민간인이지만 군인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발견 당시 건강에 이상이 없었고 코로나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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