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북한군에 살해된 뒤 불태워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에 대해 처음부터 ‘월북설(越北說)’을 주장했다. 주요 근거 중 하나로 “배에 신발을 벗어놓고 사라졌다”는 점을 내세웠다. ‘실족(失足)이 아니라 신발을 벗고 의도적으로 바다에 뛰어든 것’이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지난달 21일 '무궁화 10호'에서 발견됐다고 밝힌 슬리퍼. /연합뉴스
정부가 지난달 21일 '무궁화 10호'에서 발견됐다고 밝힌 슬리퍼. /연합뉴스

하지만 홍문표 국민의힘 국회의원과 본지 취재 결과, 사건 발생 17일이 지난 7일 현재까지 ‘이씨가 벗어놓았다’는 신발은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 어디에도 없었다. 정부가 ‘이씨가 벗어놓은 신발’이라고 주장한 것은 승선 인원들이 선내에서 비번이거나 업무 이외의 시간에 신던 ‘슬리퍼’였을 뿐이다. 이씨가 ‘무궁화 10호’에 승선할 당시 신고 왔던 구두 또는 운동화, 업무 시간에 신는 안전화는 없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씨가 신발을 벗어놓고 사라졌다’고 발표, 이씨가 월북한 것으로 몰아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합동참모본부는 지난달 24일 이 사건 첫 브리핑에서 “이씨가 어업지도선 이탈 시 본인의 신발을 유기한 점 등으로 미뤄 자진 월북 시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신발을 벗어 놓고 사라졌으니 실족이 아니란 얘기였다. 같은 날 해양수산부는 “슬리퍼를 가지런히 벗어 놓은 것으로 봐서 실족으로 추측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로프 더미 속에 파묻힌 슬리퍼 사진도 공개했다.

피격 공무원 탑승' 무궁화10호, 연평도에서 목포항으로 출발
 서해 최북단 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후 북한군에 피격·사망한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 A씨(47)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10호'가 26일 오전 인천시 연평도에서 전남 목포 서해어업관리단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이날 이른 아침 무궁화10호가 출발 전 연평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모습. 2020.9.26/연합뉴스
피격 공무원 탑승' 무궁화10호, 연평도에서 목포항으로 출발 서해 최북단 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후 북한군에 피격·사망한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 A씨(47)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10호'가 26일 오전 인천시 연평도에서 전남 목포 서해어업관리단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이날 이른 아침 무궁화10호가 출발 전 연평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모습. 2020.9.26/연합뉴스

그러나 동료 선원들은 “슬리퍼를 신고 승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씨와 같은 배에 있었던 한 선원은 “우리에게는 승선이 곧 출근인데, 슬리퍼 신고 출근하는 공무원이 세상에 어딨느냐”며 “구두나 운동화, 안전화를 신고 배에 오른다”고 했다.

 

안전화는 근무용 신발이다. 배가 흔들려 물건이 떨어지거나 넘어질 때를 대비해 겉이 단단한 안전화를 신는다. 특히 선내 곳곳을 다니는 당직 근무 때는 꼭 착용한다고 한다. 이씨는 실종 당일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당직 근무였다.

그런데 배에는 이씨의 안전화는 물론 구두나 운동화가 아예 남아있지 않았다. 홍문표 의원은 7일 “지난달 27일 해경은 이씨가 탔던 ‘무궁화 10호’의 이씨 개인 침실에 있던 모든 물품을 가져왔지만 구두나 안전화 등 승선 당시 신고다녔다고 볼만한 신발은 없었다고 해양수산부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다만 정부가 ‘이씨 것’이라 주장한 갑판 위 슬리퍼 외 또 하나의 슬리퍼 한 켤레가 있었다고 한다.

해경은 이씨의 침실에서 나온 슬리퍼와 갑판의 슬리퍼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DNA 감식 의뢰했고, 이달 초에야 감식 결과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감식 결과를 받기도 전인 지난달 24일 정부는 ‘이씨가 벗어놓은 신발’이라고 발표했다. 문제는 해경이 감식 결과를 전달받고도 그 결과를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해경 관계자는 “수사 중인 사안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본지 취재에 따르면 해경 조사에서 무궁화 10호 승선 선원 16명 가운데 누구도 “발견된 슬리퍼는 이씨 것”이라고 증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선원은 조사팀에 “슬리퍼가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누구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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