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경제 실패' 인정하자 "나의 큰 죄" 반성 릴레이
 

북한은 21일 국가정보원이 전날 국회에 보고한 '김정은의 위임통치'설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위임통치론은 북한 특유의 유일영도체제와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북한이 즉각 반발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일단 이날은 침묵한 것이다.

대신 북한은 이날 고위 간부들의 '자아비판'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이례적으로 경제 실패를 시인하며 제8차 당대회를 조기 소집(내년 1월)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하루 만이다. '반성 릴레이'는 경제 실패를 인정한 김정은의 권위 훼손을 막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조치로 보인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올해 북한의 최대 관심사인 노동당 창당 75주년(10월 10일)을 자축할 만한 성과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주민들의 기대감을 낮추려는 조치들이 가동된 듯하다"고 했다.

◇자아비판 경쟁 나선 北 간부들

이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1면은 당정 고위 인사들이 '경제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며 충성을 다짐하는 기고문들로 도배됐다. 이번에 물난리가 난 황해북도의 박창호 도당위원장은 "일을 쓰게(제대로) 하지 못해 우리 원수님(김정은)께서 그처럼 험한 진창길을 걸으시게 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했다. 김정은이 지난 7일 렉서스 차량을 직접 몰고 황북 은파군 대청리 수해 현장을 찾은 것을 언급한 것이다.

장길룡 화학공업상은 "화학공업 부문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한 원인은 우리 (화학공업)성 일꾼들이 전략적 안목과 계획성이 없이 사업한 데 있다"고 자책했다. 김광남 김책제철연합기업소(김철) 지배인도 기고문에서 "나라의 경제 전반이 제대로 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금속공업의 맏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김철에 큰 책임이 있다"고 했다. 고인호 내각부총리 겸 농업상과 김봉석 평양시당위원회 부위원장도 반성 대열에 동참했다.

◇초라한 黨 창건일 의식해 승부수 던졌나

과거 북한은 내부 불만 해소를 위해 고위 간부를 희생양으로 삼는 방식을 썼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던 1997년 '미제의 고용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노동당 농업비서 서관희, 2010년 화폐개혁 실패 책임을 지고 총살당한 박남기 노동당 계획경제부장이 대표적이다.

이번처럼 수령의 실패 인정과 뒤이은 간부들의 자아비판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고위급 탈북민 A씨는 "수령이 경제 실패를 직접 인정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얘기"라며 "북한 주민들이 과거처럼 '희생양 쇼'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 1차장을 지낸 남주홍 경기대 석좌교수는 "50일 앞으로 다가온 노동당 창건 75주년에 내놓을 성과가 없는 데 대한 김정은의 초조함이 커 보인다"고 했다. 북한에서 당 창건 기념일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생일과 맞먹는 '명절'로, 5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정주년)는 특히 성대하게 기념해왔다. 하지만 제재 장기화에 코로나 사태와 수해까지 겹치며 경제가 망가져 도저히 잔치 분위기를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 사업 등 당 창건 75주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추진해온 김정은의 역점 사업들이 줄줄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했다. 전날 국정원도 국회 정보위에 "(북한이) 국경 봉쇄 장기화로 외화 부족 현상이 심각하고 주요 건설 대상을 대폭 축소했다"고 보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은 위기 모면을 위해 '경제 실패 인정'과 '당대회 조기 소집'이란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분석된다. 초라한 당 창건 75주년에 실망할 민심을 의식해 예방주사('경제 어렵다')를 놓는 한편, 주민들의 시선을 더 큰 정치 이벤트(내년 1월 8차 당대회)로 분산시켰다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2/20200822001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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