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0년, 아직도 아픈 상처] 국군포로 8만명, 송환은 8300명뿐
 

"국군 전사자 유해도 찾아왔는데, 국군포로 몇 명 데려오는 게 이리 힘든 것입니까?"

탈북 국군포로 유영복(90)씨는 25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을 텔레비전으로 보다 중간에 껐다고 했다. 그는 국군포로로 북한에 잡혀 있다가 2000년 탈북해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10년 넘게 국군포로 송환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는 "남북 관계에서 국군포로 문제는 부차적인 게 됐다. 모든 건 다 때가 있는데, 그때가 지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4년 유엔은 북한 내 생존 국군포로 숫자를 약 500명으로 추정했는데, 그들의 나이를 감안하면 이제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는 것이다. 유씨는 2년 전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국군포로 송환에 국가가 힘써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날 유씨의 목소리엔 좌절감과 분노가 배어 있었다.

국방부에 따르면 6·25 국군포로 8만명 가운데 공식 포로 교환으로 돌아온 국군은 8300명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북에서 돌아오지 못했지만, 1994년 고(故) 조창호 중위를 시작으로 80명의 국군포로가 탈북해 한국 땅을 밟았다. 탈북민 지원 단체 '물망초'에 따르면 이 중 23명이 생존해 있다. 10대 때 6·25에 참전했던 이들은 북한 내 격오지에서 30~40년을 일했고, 한국에 다시 오기까지 평균 50년이 걸렸다.

6·25 때 7사단에 배속돼 전장에 나선 김성태(88)씨는 전쟁 발발 사흘 만에 경기도 양주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다. 김씨는 "그날 우박 같은 소나기를 뚫고 중대장을 업은 채 고지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적이 쏜 박격포 파편에 맞고 쓰러져 포로가 됐다"고 했다. 김씨는 65세 때까지 약 40년을 함경도 회령·온성의 탄광에서 일하다 2001년 북에서 얻은 아들과 함께 탈북했다. 그는 "6·25를 두고 북침(北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고 기겁했다"며 "젊은이들이 6·25에 관한 사실을 제대로 알아달라"고 했다.

이규일(88)씨는 1951년 2월, 3사단에서 기관포 소대원으로 복무하다 포로가 됐다. 양강도의 한 협동농장에서 중노동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그러다 2008년 아내와 막내딸, 손녀 둘을 데리고 탈북해 한국땅을 밟았다. 그는 "6·25는 독재자 김일성의 망상에서 비롯된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며 "우리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국군포로를 데려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억울하고 분이 찬다"고 했다.

국군포로가 탈북해 한국에 오면 정착 지원금과 함께 그동안 받지 못한 월급 등을 포함해 약 3억~5억원을 받는다. 평균 150만원 정도의 군인 연금도 나온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어두운 이들의 돈을 노린 가족·친지와 갈등을 빚거나 사기당하는 경우도 있다. 김성태씨도 한국에 들어와 사기 사건에 휘말려 전 재산 2억5000만원을 잃었다. 지금은 경기 남양주의 10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산다.

국군포로 출신 이모(98)씨는 2005년 나이 팔십이 넘어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전쟁통에 헤어졌던 아내와 61년 만에 재회해 10년을 같이 살았다. 하지만 아내가 세상을 뜨자 일흔이 넘은 외아들은 "아버지가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며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물망초 관계자는 "지원금 대부분을 탈북 브로커 비용이나 북한에 있는 가족 생활비로 보내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노예·고문 문제 특별보고관 등 유엔의 인권 분야 전문가들이 6·25 70주년을 맞아 "북한이 이제는 납북자와 국군포로 송환에 진정성 있게 협조하기를 촉구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들은 "국군포로 가족들이 고령화되고 있는데, 북한이 자유로운 연락 등 전향적 조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공동 기획 :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조선일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7/20200627002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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