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庸玉
/전 국방부 차관

지난해 11월 국방부는 국방백서 발간 주기를 매년에서 격년으로, 발간 시기도 10월에서 5월로 조정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국방 당국이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분명히 명시하기를 요구하는 보수적 국민 여론과 정부의 햇볕정책 및 북한의 신경질적인 거부반응 사이에 끼어 짜낸 일종의 고육지계(苦肉之計)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더욱 황당했던 것은 북한이 국방부의 조치에 대해 격년으로 발행될 국방백서에서도 북한을 계속 주적으로 명시하기로 했다고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우리 국방 당국을 안팎으로 어처구니없는 처지에 놓이게 했다는 점이다.

이제 5월 말 2002년도 국방백서 발간을 앞두고 ‘북한은 주적’ 표현이 다시 도마위에 올랐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는 정부 일각의 요구에 따라 금년도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삭제 또는 수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정부 일각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북한을 주적으로 지칭하는 표현 대신 완화된 표현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것이다.

국방부는 주적 개념 표현을 바꿀 경우 ‘주적’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95년 국방백서 이전의 ‘적’이라는 표현이나 ‘외부의 침략’ ‘안보위협 세력’ 등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국방백서 발간 취지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미국은 의회에 제출하는 연례 국방보고서 형식으로 매년 발간하고 있고, 우리나라나 일본은 주로 방위업무에 대한 국민의 이해증진과 대내외 군사적 신뢰성 및 투명성 확보 측면을 중요시하고 있다.

북한처럼 폐쇄적인 나라들은 아예 국방백서를 발표하지 않는다. 북한은 모든 군사문제를 대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비밀로 하는 나라다. 2000년 9월 사상 최초의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 우리 측이 군사 신뢰구축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제의까지도 일축한 북한이다. 그런데 그러한 북한이 우리의 국방백서를 시비하고 있다. 주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도록 행동하면서 자기를 적으로 간주한다고 우리를 시비하는 형국이다.

따라서 국방부의 주적개념 재검토 문제와 관련해선 다음과 같은 점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국방백서의 ‘주적’은 군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다. 이는 현 시점에서 군사대비 목적상 가장 경계하고 대비해야 할 외부의 군사적 위협세력을 뜻한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현 시점에서 북한군이 우리의 주적임에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둘째, ‘주적’은 또한 상황적 개념이며 가변적이다. 앞으로 상황에 따라서는 북한이 아닌 어떤 다른 특정세력이나 불특정 다수를 우리의 주적으로 상정할 수도 있다. 셋째, 주적 개념은 우리의 미래에 대비한 전력 현대화 계획과도 관련된다. 미래 대비 측면에서는 현재의 북한군 수준이 우리의 고려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이처럼 국방 당국의 주적 판단은 객관적 위협상황에 대한 군사대비 차원의 판단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만일 북한군을 주적으로 삼는 국방부의 군사적 판단을 정치적으로 문제시한다면 이는 군사적 문제를 ‘정치화(politicization)’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국방당국이 단순히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주적 개념을 재검토한다면 이 또한 군사문제를 ‘정치화’하는 과오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주적 개념은 남북 군사신뢰 관계와 연계하여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으로 북한이 군사 신뢰구축 협상에 성의를 보인다면 주적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군사문제의 ‘정치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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