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에서 온 혈육을 50년 만에 만난 가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선택받은 소수’에 끼지 못한 대부분의 이산가족들은 이번에도 애달픈 마음만 다독거려야 했다. 몇몇 가족들은 17일 북한 측 상봉단이 묵는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 앞을 서성이며 “제발 가족을 찾게 해달라”며 피켓을 들고 호소했다.

호텔 현관을 3일째 지키고 있는 한연희(여·53·서울 강동구 천호동)씨는 이날 “잠깐 나갔다오겠다던 아버지와 연락이 끊긴 지 50년”이라며 “호텔 문을 지나는 북한상봉단을 하나씩 붙잡고 혹시 아버님 생사를 아는지 수소문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고 말했다. “평양에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얘기를 25년 전 이모할머니로부터 전해들었어요. 세살 때 헤어져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님은 꼭 살아계실 것입니다. ”

한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남편 얼굴 못 보고 가는 게 한이니 너라도 꼭 찾아보거라’라고 말하신 게 가슴에 맺힌다. 아버지도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게 틀림없으니 머지않아 꼭 만날 것”이라며 울먹였다.

17일 새벽 강릉에서 올라온 석옥자(여·59)씨도 “아버지(88년 작고), 어머니(99년 작고) 모두 돌아가시고 큰언니는 6·25 때 병사, 남쪽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남동생도 67년에 베트남에서 숨졌다”며 “6·25 당시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큰 오빠를 찾는 게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했다. 석씨는 50년 전 가족 사진과 이름을 크게 붙인 도화지를 든 채 지나가는 북측 인사들을 붙들고 오빠 생사를 물었으나, 별다른 대답을 얻지 못하자 초조해했다. 석씨는 “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보니 내가 만나는 것만큼 가슴이 뛴다”며 “이렇게 속만 태우다 오빠를 찾기 전 내가 먼저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16일 롯데월드 민속관 앞에서 북측 상봉단을 붙들고 외삼촌의 행방을 수소문했던 이풍수(55·관악구 신림동)씨는 “상봉단 일행과 잠시 말이라도 붙이려 했으나 안내원이 막아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며 “이산가족이 몇명인데 이런식으로밖에 할 수 없는거냐”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 자유왕래가 빨리 이뤄져 내 손으로 외삼촌을 찾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고 말했다.

/최원석기자 ws-cho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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