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AP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AP

"철없는 백두공주서 북한 정권 2인자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동생인 김여정은 2018년 4월 1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사열 행진을 할 때 오빠 뒤를 따라걷다 황급히 레드카펫에서 내려왔다. 김씨 일가 집사 역할을 하는 김창선 국무위원장의 신호를 받고서다. 지난해엔 김정은이 미·북 정상회담을 하러 베트남 하노이로 가는 도중 정차역에서 내려 담배를 피고 옆에서 재떨이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김여정의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동안 외부에 알려진 김여정의 이미지는 김정은 지근거리에서 비서 역할을 하던 '백두혈통 공주'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김여정이 지난 3일 노동당 제1부부장 직함을 달고 실명으로 대남 비난 담화문을 발표하며 전면에 나섰다. 김여정이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처럼 북한 정권 2인자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란 해석이 나온다.

◇ 청와대에서 미소 보이던 김여정, 2년 뒤 청와대 향해 "저능한 사고방식"

김여정은 3일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는 제목의 담화문을 통해 청와대가 전날 북한의 발사체 발사에 유감을 표한 데 대해 "주제넘은 실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며 강하게 비난하고 나왔다. 김은 "자기들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내뱉는가"라고 비난했다. 김은 한·미연합훈련과 스텔스 전투기 F-35 도입도 강하게 비판하면서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 "청와대의 행태가 세살 난 아이들 같다" "하는 짓거리가 하나하나 완벽하게 바보스럽다"고 원색적인 표현을 썼다. "겁을 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짖는다고 했다. 딱 누구처럼…"이라고도 했다.

재작년 2월 김정은 특사 자격으로 김영남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해 눈웃음을 보이며 김정은의 방북 초청 의사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할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실제 김여정은 그동안 공식행사에서 김정은의 의전(儀典)을 담당하는 역할을 해왔다. 김정은에게 전달된 꽃다발을 대신 챙기거나 정상회담장 서명에 쓸 만년필을 준비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지난해엔 김정은이 미·북 정상회담을 하러 베트남 하노이로 가는 도중 정차역에서 내려 담배를 피고 옆에서 재떨이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김여정의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김여정은 지난해 6월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고(故)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자 김정은 명의의 조화와 조전을 남측 대표단에 전달하기도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혁명의 성산(聖山)’ 백두산에 오르고 있다고 조선중앙TV가 16일 보도했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여동생인 김여정(왼쪽)과 조용원(오른쪽) 노동당 제1부부장이 양옆에서 함께 말을 타고 있다./조선중앙TV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혁명의 성산(聖山)’ 백두산에 오르고 있다고 조선중앙TV가 16일 보도했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여동생인 김여정(왼쪽)과 조용원(오른쪽) 노동당 제1부부장이 양옆에서 함께 말을 타고 있다./조선중앙TV

이처럼 김정은의 '1호 비서' 역할을 해오던 김여정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북한 정권 내 위상과 역할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김정은이 말을 타고 백두산을 등정할 때 김여정이 바로 뒤에서 말을 타고 뒤따랐다. 북한 정권이 강조하는 '백두혈통'의 일원임을 대내외에 재확인한 것이다.

작년 12월엔 북한군 여성 부대에 김여정 명의의 지시가 하달되기도 했다. 북한 전문 매체 데일리NK는 지난해 12월 20일 북한 내 소식통을 인용해 김여정 명의로 "여성 군인들의 근무생활과 건강을 특별히 보살펴주도록 하고 그 정형을 요해(파악)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고 보도했다. 김여정이 군권(軍權)의 일부도 행사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김여정은 '인민군 후방 공급 사업 개선을 위한 조직정치사업을 짜고 들어 진행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지시도 각군에 하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들어선 당 간부들에게 '충성 편지'를 작성해 올리라는 지시를 내렸고, 선전 담당 작가들에게 김정은이 언급한 '백두산 대학'을 내세운 창작물을 제작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여정의 이런 움직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 노동당 비서가 걸었던 길과 유사하다. 김경희는 1976년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에 임명된 데 이어 당 경공업부장과 정책검열부장, 인민군 대장, 정치국 위원 등을 두루 역임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여정이 군대에 지시를 하달하는 등 군 관련 대외 활동에 나선 것을 두고 인민군 장군 계급을 부여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 매체에서도 김여정은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종종 비쳐졌다. 모두가 부동자세로 김정은의 연설을 듣는 동안 김여정은 기둥 뒤로 움직이거나 미소 짓는 모습이 포착됐다./YTN 캡처
북한 매체에서도 김여정은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종종 비쳐졌다. 모두가 부동자세로 김정은의 연설을 듣는 동안 김여정은 기둥 뒤로 움직이거나 미소 짓는 모습이 포착됐다./YTN 캡처

◇ '메시지' 보다 '메신저'…北, '확실한 전달' 위해 김여정 앞세우다

북한이 이 시점에 김여정을 앞세워 대남 메시지를 낸 배경에 대해서도 대북 전문가들은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북한은 대남 비난 발언은 김계관 외무성 고문이나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을 앞세웠다. 북한이 대남 메시지를 내는 데 집중했다면 최근 외무상으로 발탁된 리선권이나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김여정을 메신저로 선택한 것은 이번 담화문에 상당한 무게를 싣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대남 유화 메시지 전달자 역할을 맡아온 김여정에게 대남 강경 메시지를 내게 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여정이 담화에서 1인칭 화법을 써가며 "나는 남측도 합동군사연습을 꽤 즐기는 편으로 알고 있으며 첨단군사 장비를 사 오는데도 열을 올리는 등 꼴 보기 싫은 놀음은 다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된다.

패트리샤 김 미국평화연구소(USIP) 선임연구원은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오빠 김정은과의 친밀한 관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대남 특사 역할 등을 감안할 때 김여정 명의 담화가 강력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김여정의 북한 지도부 내 역할 변화도 감지된다. 김정은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던 역할에서 나아가 지도부의 정책 결정에 의견을 개진하고 관철시키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이번 담화문은 김여정이 대외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책에 깊게 관여한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의미가 있다"며 "김여정은 그동안 김정은의 정책 결정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 왔는데 이번에 노동당 제1부부장 명의로 이같은 입장을 발표했다는 것은 위상과 영향력에 있어서 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 센터장은 "김여정이 지난 연말 당 중앙위 제1부부장으로 새로 임명이 됐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문을 담당하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이번에 대남 담화문을 발표한 것을 보면 대외 정책 부문에 있어 김여정이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도 남북관계 비선(秘線) 역할을 한 김여정이 이제 자기 이름으로 공식 담화를 발표하며 대남 전선(戰線)의 전면에 나서는 징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 박(Jung Pak) 브루킹스 연구소 한국석좌는 이번 담화에 대해 "김여정이 김정은의 신뢰받는 조언자임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켄 고스 미국 해군분석센터 국장은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김여정의 공적 역할이 확대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 RFA는 전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04/20200304022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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