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장

북한에서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구호가 ‘자력갱생(自力更生)’이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힘(自力)으로 어려움을 돌파한다는 이 구호의 소리가 높을수록 북한 주민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자력갱생’은 1960년대 김일성 시절에도, 1990년대 김정일의 ‘고난의 행군’ 시기 때도 등장했었다. 이 해묵은 선동 구호가 2020년 새해 또다시 북한에 울려퍼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막을 내린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 보고가 그것이다. 올 1월 1일 북한은 33년 만에 처음으로 지도자의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아, 노동당 보고문이 김정은의 신년사로 간주되었다. 이 보고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가 ‘자력’으로 23회였고, 다음이 ‘정면돌파’로 22회였다. 김정은은 이 보고문에서 “적대세력의 도전은 집요하고, 부닥친 난관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기어이 자력 부강, 자력 번영하겠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자력갱생’을 강조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지난해 노동당 중앙위 제7기 4차 회의에서 ‘자력갱생’을 25번이나 입에 올렸고, 이어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회의에서도 ‘자주의 혁명노선’과 ‘자력갱생 전략’을 변함없이 고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정은은 지난해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의 미·북 정상회담에서 대북제재 완화에 대한 아무런 양보도 얻어내지 못하자 내부 단속용으로 케케묵은 ‘자력갱생’ 구호를 다시 들고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해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와 백두산 삼지연 읍지구 준공식,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관광지구 완공식 등 건설현장을 시찰할 때마다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또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해 12월 28일 게재한 ‘자력갱생은 영원한 보검’이란 기사를 통해 주민들의 정신 무장을 다그쳤다. 신문은 “우리 당은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가야 하는 올해의 장엄한 첫 진군길에서 자력갱생의 기치를 투쟁의 기치, 승리의 기치로 더욱 높이 추켜들었다”며 “자력갱생, 견인불발(堅忍不拔·굳게 참고 견디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하여 투쟁할 때만이 당이 제시한 높은 목표를 완수하고 올해의 진군길에서 영예로운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시 울려퍼지는 북한의 ‘자력갱생’
   
   북한 지도부가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경제가 어려운 데다 달리 뾰족한 수도 없기 때문이다. 노동당 중앙위 보고문은 ‘전대미문의 혹독한 도전과 난관’ ‘우리의 전진을 저해하는 모든 난관을 정면돌파전으로 뚫고 나가자’와 같은 표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숨기지 않았다. 보고문에서 ‘난관’이란 단어가 13번, 도전이 5번, 난국이 4번, 고난과 장애가 각각 2번 언급됐다. 북한 경제는 2017년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을 전후하여 사상 유례없이 강화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2371호, 2375호, 2397호)로 급격히 악화되었다. 북한산 석탄과 철광석, 수산물의 수출이 막혔고 기계와 자동차, 전기전자, 금속제품의 수입이 금지되면서 북한의 각종 건설사업에 차질이 빚어졌다. 또 북한에 대한 정유제품 공급량이 연간 200만배럴에서 50만배럴로 축소됨에 따라 트랙터 등 북한 농기계 가동률이 떨어져 식량생산마저 위협받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북한 무역총액 자료에 따르면, 2018년도 북한의 대외무역액은 28억4300만달러로 전년(55억5000만달러) 대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수출은 2억4300만 달러에 그쳐, 2017년에 비해 무려 86%나 급감했다. 수출로 들어오던 달러가 고갈되면 김정은의 비자금도 말라갈 수밖에 없다.
   
   주목할 점은 2018년 북한의 전체 무역액 가운데 북·중 무역액이 27억2000만달러로 95.7%에 달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북한의 대외무역은 거의 중국과만 이루어졌다. 게다가 북한의 대중 수출은 1억9700만달러에 그친 반면 수입은 25억2700만달러에 달해 무역적자가 23억6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벌어들이는 달러는 거의 없고 중국으로부터 사야 할 물건만 많아진 상황이다. 한 나라의 대외무역이 특정 국가와 95%를 넘어서면 이는 사실상 ‘종속 상태’라고 봐야 한다. 냉전 시기 핀란드가 대외무역의 30%를 소련에 의존하면서 소련의 정치외교적 압박을 벗어나지 못해 이른바 ‘핀란디제이션(Finlandization·핀란드화)’이란 국제정치학 용어가 생겨났었다. ‘핀란드화’란 약소국이 인접한 강대국에 의해 자결권에 제한을 당하는 현상을 말한다. 당시 소련이 핀란드 상품의 수입을 줄이면 핀란드 경제는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핀란드 총리는 수시로 크렘린을 찾아가 소련 서기장과 보드카를 마시며 외교안보 현안을 상의했다고 한다.
   
   
   산업연수생이라 속여 北 노무자 체류케
   
   수년 전부터 한국도 대중국 무역액이 전체 대외무역의 25%를 넘으면서 중국에 대한 ‘한국의 핀란드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북한의 대중국 무역의존도 95.7%란 중국의 도움 없이는 북한 경제가 한 달도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에너지의 90%, 공산품의 72%, 외자유치액의 8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김정은이 아무리 ‘자력갱생’을 외쳐도 중국의 도움과 협력 없이는 북한 경제가 돌아갈 수 없다.
   
   북한은 이미 지난해부터 중국이 달아준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이 제공하는 대북 경제 지원은 크게 세 가지다. 시진핑이 직접 지시한 중국인의 대북관광, 북한 노무자의 중국 공장 파견, 북한 광물자원의 밀수출 등이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6월 평양 방문 직후 국가기관의 공무원과 교사들에게 북한 관광을 의무적으로 갔다오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지난해 9월 24일 인터뷰한 중국 훈춘시 소식통은 “올 7월부터 시 주석의 지시로 북조선 관광이 상당히 활성화되었다. 공무원은 물론 학교와 유치원 교사들까지 무조건 북조선 관광에 나서도록 의무화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지난해 시 주석이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북한 관광 중국인을 200만명으로 확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매일경제 보도(2019년 12월 13일)에 따르면, 신의주와 마주 보는 중국 단둥(丹東)에서는 300위안(약 5만원)을 내고 북한 통행증을 받아 아침에 신의주로 들어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관광객이 크게 늘어났다.
   
   또 단둥에서 신의주를 거쳐 평양~개성~원산~금강산까지 도는 6일 코스 상품이 4300위안(약 71만원)에 팔리고 있다. 두만강 하류 훈춘 지역에서는 나진·선봉을 1박2일 여행하는 880위안(약 15만원)짜리 상품도 나와 있다. 2018년 북한을 여행한 중국인은 20만명에 달하며, 2019년에는 100만명을 넘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중국인 100만명이 북한에서 1인당 2000위안(약 34만원)을 쓴다고 가정하면, 북한의 관광수입은 3억달러에 달한다. 김정은에게는 생명수와 같은 외화수입이다. 시진핑은 북한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자국 여행객의 숫자를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한다. 입으로는 ‘자유무역’을 주창하지만, 실제로는 남북한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속셈이다.
   
   중국에서 일하는 북한 노무자들이 본국으로 보내는 위안화 역시 북한 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유엔 대북제재 2397호에 따르면, 해외파견 북한 노동자는 2019년 12월 22일까지 모두 북한으로 돌아가야 했다. 유럽에 체류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송환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국과 러시아는 이 규정을 무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RFA 보도에 따르면, 단둥 등 북한 접경지역의 중국 기업들은 북한 노무자를 ‘노동자가 아닌 산업연수생’이라 속이고 돌려보내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고 한다. 관디엔(寬甸)의 한 닭고기 가공공장은 100여명의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지만 회사 측은 “이들은 북한 당국의 위탁을 받아 산업훈련을 시키는 연수생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중국의 취업비자를 받고 온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안보리 결의에 의한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논리다. 중국에서 운영하는 북한 식당 역시 종업원을 돌려보낼 기색이 없다. 극동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북한 식당들도 유엔 제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를 정면으로 위반하며 김정은을 돕고 있는 것이다.
   
   
   ‘자력갱생’이 아니라 ‘중력(中力)갱생’
   
   이뿐만 아니라 유엔 제재 대상인 북한의 광물이 몰래 중국 측 업자들에게 밀수출되고 있는 현장이 국제 언론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일본 언론매체 아시아프레스의 오사카사무소 이시마루 지로 대표는 지난해 12월 중순 “북한이 양강도 혜산시 부근 압록강 상류 지역을 중심으로 동과 몰리브덴 등 광물자원을 국가 차원에서 밀수출하고 있다”고 RFA에 폭로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 측은 세관원이나 보위부원까지 입회하여 혜산 부근의 신파에서 꽁꽁 언 압록강 위로 15~20t짜리 대형 덤프트럭을 이용해 하룻밤에 수백t의 광물을 중국 측 밀수업자에게 넘기고 있다. 심지어 동해에서 잡힌 오징어도 컨테이너째로 중국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김정은은 연초 노동당 보고문에서 “우리 인민이 당한 고통과 억제된 발전의 대가를 받아내기 위한 충격적인 실제 행동으로 넘어갈 것”이라며 “세상은 머지않아 공화국이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러한 발언으로 보아 북한이 핵노선에서 후퇴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미국 트럼프 정부 역시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 노력 없이는 제재 완화도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북한은 현재의 유엔 대북제재를 감수한 채 ‘중국 의존의 자력갱생’ 노선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 중국 역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미국을 견제하는 카드가 된다는 점에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끌어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길이 북한을 더욱 중국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북·중 무역의 주요 수출입 품목을 보면 지난 수십 년간 큰 변화가 없다. 이는 북한이 중국과의 경제 협력에도 불구하고 자체 제조업을 발전시키지 못하여 수입제품을 대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북한은 정권 출범 후 지금까지 한국의 1960~1980년대 산업화 과정과 같은 자국 산업 발전 단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내려오는 3대 세습 독재체제가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지만, 박정희가 통치하던 18년의 경제발전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1960년대 북한 주민들에게 약속한 ‘이밥에 고깃국’은 2020년인 지금도 아득한 꿈이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이 핵을 움켜쥐고 지금의 일인 독재 전체주의 체제를 고수하는 한 벗어날 수 없다. 또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 경제는 중국이 달아준 ‘산소호흡기’에 더욱 의존하는 상황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자력갱생’이 아니라 중국 힘에 의존한 ‘중력갱생(中力更生)’이 될 판이다. 북한은 더 이상 국민을 속이는 ‘자력갱생’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이 실제로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진정한 ‘자력갱생’의 길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김정은이 북핵 문제에서 통 큰 양보와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북한이 이러한 결단을 통해 중국 의존에서 탈피해야 진정한 남북 통합과 통일도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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