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북한이 2017년 3월 18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진행한 신형 고출력 로켓 엔진 분출 시험 모습. photo 조선중앙방송
북한이 2017년 3월 18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진행한 신형 고출력 로켓 엔진 분출 시험 모습. photo 조선중앙방송

레드라인(red line)은 국제정치학적으로 외교적 수단에서 무력대응 등 비외교적 수단을 택하게 되는 분기점(turning point)을 뜻한다. 레드라인이 언제부터 국제정치학에서 사용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 국가가 상대국에 넘어서지 말라고 설정한 금지선, 다시 말해 최대한 인내할 수 있는 임계치(臨界値)를 말하는 용어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레드라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8년 8월이었다. 당시 북한은 대포동 1호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 미사일은 일본 열도 상공을 넘어 1500㎞를 날아가 태평양에 떨어졌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하고, 북한 핵·미사일 해결책 마련에 들어갔다. 이때 나온 것이 ‘페리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과 봉쇄정책을 나누는 기준인 레드라인이 적시됐다.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하는 핵 개발 활동을 하거나, 중·장거리 미사일을 다시 발사하거나, 대규모 대남 무력도발을 반복적으로 할 경우 등을 레드라인으로 정했다. 하지만 페리 보고서에 적시된 레드라인은 오래전에 유명무실해졌다. 북한은 지금까지 6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고, 화성-14형과 15형 등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해 시험발사까지 했다. 미국 등 국제 사회는 그동안 강력한 제재 조치를 내렸지만, 북한의 비핵화는 이미 물 건너갔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북한의 ‘새로운 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2월 3일 김정은에게 지난해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비핵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2년 만에 김정은을 ‘로켓맨’이라고 지칭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월 8일 트위터에 “김정은이 적대적 방식으로 행동하면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강경한 입장은 북한의 도발 강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레드라인을 넘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경고는 김정은이 레드라인을 넘을 경우 내년 재선가도에 치명적인 악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그동안 북한의 핵실험·ICBM 시험 발사 중단을 최대 외교 업적으로 내세워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정국까지 맞닥뜨린 상황에서 북한의 핵실험 및 ICBM 시험 발사 등 추가 도발로 본토가 위협받는 상황이 될 경우 자칫하면 재선에 실패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낙관론을 계속 피력하면서 ‘현상 유지’에 주력해왔던 입장과는 달리 미국도 필요할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서 ‘플랜 B’ 카드를 살짝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올 들어 13차례나 각종 탄도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 등을 시험 발사하면서 무력 도발을 일삼아왔다. 게다가 북한은 서해 창린도 해안포 발사를 감행하면서 지난해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체결한 9·19 남북 군사합의서의 규정을 위반했다. 북한은 지난 12월 7일 서해위성발사장(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고체 연료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로켓 엔진 연소 시험을 실시했다. 제프리 루이스 미국 미들버리 국제학연구소 동아시아 비확산센터 소장은 “북한이 ICBM이나 인공위성용 로켓의 엔진을 시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이처럼 ‘새로운 길’을 가겠다면서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하며 ‘연말 시한’을 제시하고 각종 도발을 자행하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벼랑 끝 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은 과거에도 이처럼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면서 한·미가 그어놓은 레드라인을 조금씩 물러나도록 해왔다. 특히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가 없을 경우 비핵화 협상 재개는 어렵다는 주장을 연일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의 의도는 ‘선(先) 적대시 정책 철회, 후(後) 비핵화 협상’을 통해 한·미 연합훈련 중단, 미군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금지, 제재 철폐 또는 완화 등을 비롯한 반대급부를 최대한 많이 얻어내겠다는 속셈이다.

김정은이 지난 12월 4일 또다시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오른 것도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일종의 ‘협박’이다. 김정은은 박정천 총참모장과 군종 사령관, 군단장 등 군 간부들과 함께 백두산을 등정하면서 자신이 미국에 제시한 비핵화 협상 시한인 연말이 다가오는데도 미국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무력 도발에 나설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김정은은 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정치·외교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방문하곤 했다. 김정은은 두 번째 ‘백두산 백마 쇼’를 극대화하기 위해 12월 하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소집할 예정이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당 대회와 당 대회 사이 중요한 노선이나 대내외 정책의 변화를 결정하는 정책결정기구다. 이번 전원회의는 올해 두 번째로, 4월 10일 개최된 제4차 전원회의 이후 8개월 만이다.

 
김정은이 지난 12월 4일 말을 타고 군 지휘관들과 함께 백두산을 오르고 있다. photo 노동신문
김정은이 지난 12월 4일 말을 타고 군 지휘관들과 함께 백두산을 오르고 있다. photo 노동신문

사실상의 ICBM 발사

북한은 지난해 4월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4월 21일부터 핵실험과 ICBM 시험 발사를 중지한다”는 ‘모라토리움’을 공식 결정했다. 당시는 지난해 6월 12일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열린 전원회의로,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원회의 결정사항을 통해 핵실험과 ICBM 시험 발사 중지를 약속했었다. 이번 전원회의에선 ‘새로운 길’을 구체화한 새로운 노선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길’은 핵무기와 ICBM의 양적 확대를 통해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완성을 통해 추가적인 핵 억제력을 확보하며, 중국·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 및 자력갱생을 통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 켄 고스 미국 해군분석센터(CNA) 선임국장은 “김정은의 백두산 재차 등정은 더욱 공격적으로 군사력 위주의 ‘벼랑 끝 전술’을 취하겠다는 전략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라면서 “당 전원회의는 이런 방향을 발표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스 국장은 “김정은은 최선을 다해 미국과 대화했으나 미국이 대북 적대 정책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핵과 ICBM 개발에 나설 계획임을 밝힐 것”이라며 “결국 2020년에는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설정한 레드라인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 북한은 그동안 미국 역대 정부가 설정한 레드라인을 조금씩 넘어서면서 핵과 ICBM 개발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북한은 지금까지 레드라인을 넘을 것처럼 제스처를 보이면서 이를 중대하게 인식한 미국 역대 정부가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도록 교묘하게 전술을 구사해왔다. 그 결과, 북한은 미국 역대 정부의 강경한 제재 조치 등에도 불구하고 결국 레드라인을 넘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여섯 차례 실시한 것과 ICBM까지 개발한 것은 미국 역대 정부의 레드라인을 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트럼프 정부의 레드라인인 핵실험과 ICBM 시험 발사 중지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한으로선 건너가지 못할 금지선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은 서해위성 발사장에서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장거리 로켓을 발사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2016년 2월 이곳에서 인공위성 발사를 핑계로 장거리 로켓 ‘광명성 4호’를 쏘아 올리는 등 지금까지 모두 총 5차례 로켓을 발사해 두 차례 성공했다. 인공위성을 탑재한 장거리 로켓 발사는 사실상의 ICBM 발사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은과 북한 정권의 의도는 벼랑 끝 전술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설정한 레드라인을 넘겠다고 위협하면서 실전배치만을 남겨둔 핵무기를 손에 쥔 채 모든 제재의 폐지와 평화협정 및 미·북 관계 정상화 등 반대급부를 얻어내려는 속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반대급부를 제공하고 미국 국민들은 물론 국제사회에 북한이 자신이 설정한 레드라인을 지켰다면서 업적을 과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서 정상국가로 대우해주는 셈이 될 것이다. 특히 이렇게 된다면 한국은 북한의 ‘핵 인질’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일본 등도 핵 무장에 나설 명분을 줄 수 있다. 때문에 트럼프 정부의 진정한 레드라인은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또는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와 ICBM을 비롯해 생화학무기 등 모든 대량살상무기 등을 폐기하는 것이라야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오산 공군기지를 방문해 주한미군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photo 백악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오산 공군기지를 방문해 주한미군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photo 백악관

사실상 무용지물 된 레드라인

게다가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레드라인을 이미 넘어갔다. 미국 민간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지난 10월 30일 공개한 ‘2020 미국 군사력 지표’ 보고서에서 “평양은 이미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고, 핵무기를 장착한 장거리미사일을 미국 본토까지 도달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보고서는 “북한이 SLBM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개선해왔다”면서 “두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에도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생산이 감소한다는 근거는 없고, 미국 정보기관들은 오히려 북한의 핵물질 생산이 증가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위성사진 분석 결과 북한이 미사일과 대기권 재진입체, 발사대, 핵무기 생산시설을 개선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보고서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서 보듯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 위협도 한국에 실질적인 위협이며, 남북 간 군사적 신뢰조치 구축에도 북한의 대남 전술적·전략적 위협은 줄지 않았으며, 비핵화 또한 진전이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제 미사일 전문가들은 지난 5월 시험 발사된 ‘북한판 이스칸데르’ 미사일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어 자칫하면 ‘게임체인저(game changer)’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브루스 클링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이스칸데르급 미사일에는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되며, 북한이 이번에 신형 방사포라고 주장한 무기에는 생화학탄 탑재가 가능하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런 분석과 평가가 맞는다면 한국의 청와대 등 주요 시설은 물론 주한·주일미군의 주요 기지나 전시 병력 증원의 통로가 되는 한국의 주요 항만시설과 공군기지들은 북한의 타깃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북한은 SLBM 개발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북한은 지난 10월 2일 북극성-3형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북한이 고각 발사한 북극성-3형은 최대 비행고도는 910㎞, 거리는 450㎞로 정상 발사했을 경우 1500~2000㎞를 날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건조하고 있는 3000t급 신형 잠수함에 북극성-3형을 실전배치할 경우 주일 미군기지들은 물론 괌과 하와이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 데이비드 맥스웰 미국 조지타운대 전략안보연구소 부소장은 “SLBM을 탑재한 잠수함은 북한에 진정한 게임체인저의 능력을 부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의 레드라인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이 설정한 레드라인은 한국이나 일본의 안보를 무시한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 정부가 제시해온 레드라인은 북한의 탄도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타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은 2017년 8월 29일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을 일본 열도를 넘어 날아가도록 발사해 일본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당시 화성-12형의 비행거리는 2700㎞, 최대고도는 550㎞를 기록했다. 화성-12형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 모두 5차례나 일본 열도를 넘어 날아가는 탄도미사일과 인공위성용 로켓을 발사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본으로선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과 이스칸데르급 미사일 및 SLBM이 가장 두려운 무기이다. 북한 외무성 일본담당 부국장이 지난 11월 30일 담화를 통해 “아베는 진짜 탄도미사일이 무엇인가를 오래지 않아,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일본 정부가 설정한 레드라인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북한의 각종 도발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북한에 대한 레드라인조차 제대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레드라인에 대해 “북한이 ICBM을 완성하고 핵탄두를 탑재해 무기화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의 이런 입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북한의 단거리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 도발에도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단거리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가 주요 정부 및 군사시설은 물론 국민들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들을 파괴할 수 있다는 우려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이 해안포로 연평도를 포격하고 DMZ에서 군사도발을 하더라도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면서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코앞에 다가왔다. 북한의 핵무기 소형화·경량화·다종화는 시간 문제다. 문 대통령이 말했듯이 한국의 안보는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말 그대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평화 타령을 그만 접고 김정은에게 분명한 레드라인을 제시하고 강력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고대 로마의 군사전략가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고 말했듯이 그 어느 때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13/20191213016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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