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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납북 50년… 끝내 못 돌아온 11명에 눈감은 정부
조선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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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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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가족들
"수십년간 정부에 생사라도 알려달라 사정했지만 '모른다' 말만 반복… 이젠 지쳤다"

피해자 부모들 다수는 세상 떠나
"당시 23세던 막내딸 잃은 어머니 '보고싶다' 눈물 흘리다 돌아가셔"



 

"그때 동생한테 대한항공 채용 공고를 전해준 게 나예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정현수(88)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씨 여동생은 7남매 중 막내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공부해 연세대 도서관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동생은 졸업 후 1969년 4월 승무원이 됐다. "취업했다!"며 어머니를 끌어안았던 동생은 8개월 만에 북한으로 끌려갔다.

11일은 이른바 'KAL기 납치 사건' 50년이 되는 날이다.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YS-11 항공기(이하 KAL기)가 승객 사이에 숨어든 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납치됐다. 한국인 승무원 4명과 승객 46명이 타고 있었다. 정씨 동생 경숙(당시 23세)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이듬해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북한은 50명 중 39명을 송환했다. 그러나 정씨의 동생을 비롯한 11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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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KAL기 납치피해자가족회와 북한인권 시민단체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등이 경기 파주 임진각에서 영동방송 프로듀서 황원씨 등 아직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한 11명을 송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KAL기는 1969년 12월 11일 북한 공작원 조창희에게 납북돼 당시 승객 50명 중 39명만 송환됐다. /전환기정의워킹그룹

정현수씨는 9일 "매년 12월이면 동생 생각이 나서 몸이 아프다. 그냥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홍원군이다.

어머니는 2000년 세상을 떠났다. 끝내 북으로 끌려간 딸의 얼굴을 못 봤다. "어머니께서 소원이라며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눈물을 흘리다 돌아가셨어요. 그게 이제는 내 마지막 소원이 됐습니다." 정씨는 2001·2006년 이산가족 상봉에 지원했다. 북한에서 돌아온 답변은 '생사 불명'과 '그런 사람 없음'이었다.

한때 납북 피해자 11명을 함께 찾아다녔던 그 가족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나이가 너무 들면서 연락이 끊겼다.

또 다른 납북 피해자 장기영(당시 41세)씨의 아내 이모씨는 "북한 말만 앵무새처럼 전하는 우리 정부에 지쳤다"고 했다. 이씨 남편은 경기 의정부에서 한식당을 했다. 슬하에는 자식 넷이 있었다. 어느 날 서울로 간다며 비행기를 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부였던 이씨는 한순간 가장(家長)이 됐다. 낮에는 남편이 하던 한식당을 운영하고, 밤이면 네 남매를 돌봤다. 납북 당시 세 살이던 막내아들에게는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야 아버지 얼굴 사진을 처음 보여줬다. 그러고는 학교에 제출하는 아버지 직업란에 '회사원'으로 적게 했다. '납북자 가족'이라고 불리는 게 싫어서였다. 남편이 돌아오리라 믿고 재혼도 하지 않았다. 2001년 이산가족 상봉에서 납북됐던 승무원 성경희씨가 78세 노모(老母)와 만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장성한 막내아들 장일석(52)씨가 희망을 갖고 통일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납북 KAL기 미송환자 신원 정리 표

20년 가까운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정부의 요지부동에 이제는 힘이 빠졌다고 한다. 장씨는 "절박한 마음에 국정원까지 찾았지만, 모든 기관으로부터 '모른다'는 답 말고는 받아본 적이 없다"며 "고작 몇 시간 거리에 계신 아버지가 살아는 계신지 아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더라"고 했다.

아직 포기하지 못한 가족도 있다. 'KAL기 납치피해자 가족회' 대표 황인철(52)씨다. 당시 상사를 대신해 출장을 떠났다 돌아오지 못한 영동방송(현 MBC 강원영동) 황원(당시 32세) PD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송환에 일생을 바쳤다. 1990년대부터 도서관을 드나들며 국제법을 공부했고, 지금껏 유엔인권이사회·국제적십자사위원회·국제앰네스티 등 안 찾아간 국제기관이 없다.

황씨는 우리 정부의 냉대가 가장 큰 상처였다고 했다. "어느 날 한 외교부 서기관이 '40년도 더 지난 얘기를 끄집어내느냐'고 면박을 주더군요. 일각에서는 '다른 가족은 가만히 있는데 왜 당신만 난리냐.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와요. 그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던 황씨는 2007년부터는 아예 아버지 송환에 '올인'했다.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필요할 때만 일해도 되는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가 됐다. 황씨는 "아내와 세 딸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학생인 세 딸은 늘 "할아버지를 찾느라 아빠가 고생한다"며 격려한다고 한다. 8일 황씨와 임진각을 찾은 둘째 딸(18)은 북을 향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곡 제목은 '가고파'. 1970년 한국으로 돌아온 납북 피해자들에 따르면, 황씨 아버지는 납북된 뒤 이 노래를 부르다가 어디론가 끌려갔고, 다시는 다른 납북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KAL기 납북 사건

1969년 12월 11일 승객·승무원 50명을 태우고 강릉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간첩에 의해 납북된 사건. 이륙 14분 만에 승객 사이에 숨어든 간첩 조창희가 조종사를 협박, 기수를 북으로 돌려 함경남도 정평군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시켰다. 국제 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북한은 1970년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39명을 돌려보냈지만, 나머지 11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11/20191211003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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