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어떻게 통일을 이뤘나]
정부, 北정권과 관계에 방해될까 북한인권·탈북자 문제 외면

서독, 통일과정에서 주도권 유지… 동독 탈출 주민들 과감히 포용
민주화시위 이어지며 장벽 붕괴

 

동독 지원땐 인권개선 등 조건걸어
베를린장벽 자동사격장치 없애고 여행·서독TV시청 허용 등 받아내

김태훈 논설위원·출판전문기자
김태훈 논설위원·출판전문기자

김정은 눈치 보기로 일관해 온 현 정부의 행태가 마침내 귀순 의사를 밝힌 탈북 주민을 강제 북송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 정부는 북한 정권과는 금강산 관광 재개와 올림픽 공동 개최를 모색하고 김정은 방한에도 목을 맨다. 반면 탈북자 모자를 굶어 죽게 방치했고, 대북 인권 단체 지원도 대부분 끊는 등 북한 주민의 인권 신장은 외면하고 있다. 지난 14일 채택된 유엔 북한 인권 결의안도 2008년부터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해 왔던 전례를 뒤집고 빠졌다.
 

현 정부는 탈북자를 받아들이고 북한에 인권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남북 관계에 악영향을 준다고 여긴다. 청와대가 최근 방한한 오토 웜비어 부모 면담을 거절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는 분단 시기 내내 통일의 주도권을 쥐고 동독 주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했던 서독의 대(對)동독 정책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서독은 동독과 관계 개선하는 일을 '동독 인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인도주의적 해법 찾기 노력'으로 규정하고 동독인 인권 신장과 민간 교류 확대를 추진한 끝에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통일에 성공했다. 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북한 주민을 대한민국 편으로 만들지 못하고 김씨 왕조와 관계 개선만 추진하는 대북 정책으론 평화 정착도, 통일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동독인 대탈주가 동독 정권 붕괴 초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무너졌다. 장벽 붕괴의 직접적 계기는 그해 여름 시작된 동독인들의 대규모 탈출이었다. 체코 주재 서독 대사관으로 동독인 수천 명이 몰려들자 9월 30일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이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에 나타났다. 동독 이탈 주민 4000여 명 앞에 선 그는 "나는 여러분의 이주가 허용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선언하고 그들을 서독 주민으로 받아들였다. 대규모 탈출 사태는 동독 내 민주화 요구 시위로 번졌다. 라이프치히에서 30만명이 참여한 시위가 벌어졌고, 동베를린에선 주민 70만명이 자유선거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사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동독 당국은 동·서독 여행 자유화를 발표했고 장벽은 28년 만에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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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이틀 뒤인 1989년 11월 11일, 동독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많은 동베를린 주민이 무너진 장벽을 지나 서베를린으로 들어가고 있다. /AP 연합뉴스

 

장벽이 설치된 1961년에도 대규모 탈출극이 벌어졌다. 장벽 설치 5개월 전인 1961년 3월, 동독 국가주석 울브리히트가 모스크바를 방문해 동·서독을 가르는 장벽 설치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 발언 직후 동독 전역에서 '마감 시간 공포증'이라고 한 탈출 사태가 빚어졌다. 동독인들은 서독으로 가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떠나려고 서둘러 짐을 쌌다. 상반기에만 10만명이 동독을 떠났고, 장벽 설치 직전인 7월엔 3만명이 한꺼번에 서독으로 향했다.

◇동독 정부의 인권침해도 감시

1969년 서독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내걸고 동독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1971년 교통 협정으로 동·서독과 동·서 베를린 사이에 철도·도로·운하 27개가 개설됐다. 이듬해 두 독일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조약이 맺어졌다. 상호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독립과 주권을 존중하며 상주 대표부를 교환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통신 교류, 상호 방문, 고속도로 통행 등 협정 10여 건을 더 맺음으로써 서독은 동독 주민들 속으로 들어갔다. 인권 감시에도 나섰다. 고문과 협박 등 동독 당국의 인권 범죄를 다룰 '잘츠기터 중앙인권침해기록보관소'가 설립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장벽을 넘는 동독 주민이 사살당하면 총을 쏜 병사 이름을 주변 병사들이 장벽 너머로 외쳐 고발했다. 브란트는 서독 연방의회에 동방정책에 따른 동독인의 인권 개선 현황을 해마다 보고했다.

◇"자유가 서독 자동차와 함께 동독 누벼"
 
독일 통일 과정

헬무트 슈미트 정부 때는 서독 주요 지역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동독 내부 도로 건설 등에 20억 마르크를 쏟아부었다. 서독인들은 이 도로를 자동차로 달렸다.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동독 최고 지도자 호네커에게 "이념이 자동차와 함께 간다"는 말로 서독의 자유와 풍요가 동독인들 눈에 띄는 것을 우려했지만 호네커는 속수무책이었다. 1980년대 동독 경제는 호네커의 경제 자문관 귄터 미타크가 "칼날 위에 서 있다"고 토로할만큼 어려웠고 서독의 도움이 절실했다.

호네커는 서독 돈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두 독일이 병존하기를 바랐다. 서독은 도움을 주되 대가를 받는 상호주의로 대응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1983년 빚에 쪼들린 동독이 요청한 10억 마르크(약 4억달러) 차관 보증을 들어주고 이듬해 베를린 장벽에 설치된 자동 사격 장치 6만정 철거 조치를 요구해 관철했다. 동독 정부가 설치한 이 총기는 사람이 접근하면 감지해 총격을 가하는 장치로, 동독의 대표적 인권유린 사례였다. 콜 총리는 4만명에 이르는 희망자를 서독으로 이주시켰고, 상호 방문 절차와 검문도 간소화했다. 1987년 호네커가 서독을 방문했을 때도 과학기술 협력 확대라는 선물을 주고 대신 여행, 방문, 소포 운송 확대를 받아냈다.

◇지원 조건은 인권 개선과 교류 확대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인들에게는 방문 환영금도 지급했다. 동독인들은 이 돈으로 쇼핑한 물건을 동독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나눠 줬다. 선물을 받은 주민들 마음은 동독 체제에서 더욱 멀어졌다. 당시 동독인들이 지녔던 서독에 대한 선망을 보여주는 사례가 드레스덴의 별명인 '무지(無知)의 땅'이었다. 동·서독 교류 확대로 동독 전역에서 서독 TV 시청이 가능해졌지만 동쪽 끝 드레스덴은 전파가 닿지 않자 동독인 사이에서 그렇게 불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동독 체제 붕괴가 임박하자 서독은 동독에 일당 독재를 청산하고 총선을 치러 정통성 있는 정부를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이듬해 3월 동독에서 역사상 첫 자유 총선거가 치러졌고, 새로 들어선 의회가 동독 해체를 의결하며 통일이 완성됐다.


[통일 앞두고 연평균 편지 1억7000만통·소포 3500만개·전화 2300만통 주고받아]

북한이 금강산 관광 재개로 노리는 효과는 교류 확대가 아니라 북한 정권 유지에 쓰일 달러박스 확보다. 반면 동·서독 사이엔 통일 전부터 실질적인 민간 교류가 이뤄졌다. 1980년대 연평균 소포 3500만개, 편지 1억7000만통, 전화 2300만통, 전보 900만건을 주고받았다. 인도주의에 따라 이산가족 상호 방문도 허용됐다. 서독인이 1970년부터 1989년 통일될 때까지 20년간 동독 친지들을 방문하면서 사용한 금액은 200억마르크에 이른다. 같은 기간, 소포로도 동독 친지들에게 150억마르크 상당의 선물을 보냈다. 서독인 600만명이 해마다 동독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동독인들도 연간 150만명이 서독을 여행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년 전인 1987년엔 서독을 방문한 동독인이 500만명에 이르렀다. 동·서독 도시 62개가 자매결연을 맺고 서로 교류했다. 그러나 남북 민간 교류를 체제에 대한 부담으로 여기는 북한 정권은 주민의 자유왕래는 물론, 이산가족의 편지 교류와 화상 상봉 같은 인도주의적 요구조차 외면하고 있다.

※참고한 책: '통일의 길, 바로 가고 있는가'(강경식·이기주) '통합 정책과 분단국 통일: 독일 사례'(통일연구원)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이용준) '통일을 이룬 독일 총리들'(귀도 크놉) '얄타에서 베를린까지'(윌리엄 스마이저), '베를린, 베를린'(이은정)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28/20191128000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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