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익
/2000년 탈북, 전 북한 8·15훈련소 선전대 작가

경수로 건설이 한창인 함남 신포는 어항(漁港)으로도 유명하다. 생선을 잡아올려 통조림을 만들거나 제분 가공을 할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춘 원양어선 「금강산」호가 들어와 정박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네덜란드제 배는 가공모선으로서는 북한 최대일 뿐 아니라 유일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덕분에 신포에는 김정일 지시로 만들어진「어로공 문화회관」도 있다. 이곳에서는「먼바다예술선전대」를 조직해 정기적으로 바다에 나가 원양어선 선원들을 위해 노래와 화술로써 사상교육을 하게 된다.

작가였던 나는 91년부터 93년까지 이 예술선전대에 소속돼 일했다. 1년에 한두 번씩 먼바다예술선전대원 약 30여 명이 편대를 짜 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한 번 나가면 최소 20일은 망망대해에 떠있게 된다. 필자는 대원들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아 두 번 대양으로 나간 적이 있다. 극동의 오호츠크해와 베링해까지 명태· 청어잡이가 한창인 북한 선단(船團)을 찾아가는 것이다.


◇함경남도 신포시 신포수산사업소 먼바다어로공(원양어선원) 문화회관.
우리는 600여 명이 일하고 있는 모선 금강산호에 침실과 사무실 등 거처를 두고, 운반선을 타고 다니며 미리 정한 계획에 따라 여기저기 퍼져 있는 북한배들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한다. 배위에서 먹고 자면서 공연연습을 하고, 어로공들에게 적합한 작품을 만들어 내느라고 고심한다. 공연에는「바다의 노래」,「내 고향을 찾아서」 등 서정적인 노래도 빠지지 않는다.

외로움에 지쳐있던 원양어선 어로공들은 우리를 몹시 반긴다. 시커먼 뱃사람들끼리 있다가 대부분 여성들로 이루어진 선전대가 오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예술단에는 주부도 적지 않다. 가정이 있음에도 먼 바닷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돌아올 때 생기는 이득 때문이다. 먼바다 공연을 위한 편대를 조직할 때면 30~40대 주부배우들도 괜히 회관의 창작실을 들락날락한다. 누구나 선발되는 것은 아니어서 긴장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바다에 나갈 수만 있다면 육지에서는 비싼 값에도 사기 어려운 명란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오히려 직접 고기잡이를 하는 어로공들은 「비사회주의 행위」라고 해서 조업중 명란 채집을 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예술선전대 활동을 위해서 바다로 나온 배우들에게는 눈을 감아준다. 대원들은 공연을 마치면 누구든지 명란 채집에 정신이 없다. 대구· 돌가자미를 비롯해 희귀 어종들을 골라내 말려 육지로 가져갈 준비도 한다.

멀미를 이겨내지 못해 거의 굶다시피 하는 갓 예술대학을 나온 신출내기 여배우들도, 평소 손가락이 굳는다고 운동도 하지 않고, 빗자루 잡는 것도 꺼리는 기악배우들도 명란채집만큼은 열성이다.

돌아올 때는 장비보다 각자가 챙긴 보따리가 더 크다. 심지어 장비상자에도 명란과 말린 물고기들로 가득차 있다. 먼바다예술선전대 배우들이 다른 선전대와 비교해서 어디에 내놓아도 차림새가 돋보이고 씀씀이가 헤픈 것은 이 때 한 몫을 챙긴 덕분이다. 먼바다예술선전대원에게 바다는 예술활동의 무대이면서 보물창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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