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싱가포르 미북회담 직후 김정은 찬양 도서에서 밝혀
 

북한이 지난해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린 직후 펴낸 김정은 국무위원장 찬양 도서에서 "영구적인 핵보유와 이를 토대로 한 경제성장이 '(핵·경제) 병진(竝進) 노선'의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한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북한이 한국·미국과의 연쇄 정상회담에서 약속했던 '조선반도 비핵화'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 입장을 대변해 온 조총련의 산하 단체인 '재일본 조선사회과학자협회'는 지난해 9월 9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21세기의 태양 김정은 원수님'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핵·ICBM(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김정은의 주요 업적으로 내세우며 '영구적 핵보유'를 당연시했다. 약 400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평양 인쇄 공장에서 출판됐으며, 하노이 회담을 약 두 달 앞둔 지난해 12월 28일 2판이 발행됐다.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핵 영구 보유'를 강조한 책이 평양에서 인쇄된 것이다.
 
'21세기의 태양 김정은 원수님' 주요 내용

이 책은 3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을 '핵무기 개발'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할애하며 병진 노선을 찬양했다. 병진 노선에 대해 "우리 공화국의 자위적인 핵보유를 영구화하는 것이 병진이 안고 있는 중대한 의미" "병진 노선은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응책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핵보유의 영구화에 토대하여 경제 강국 건설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룩하는 것, 이것은 병진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의미"이라고 했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면서도 경제 지원은 챙기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핵·경제 병진 노선은 김정은이 지난 2013년 3월 천명한 북한의 정책 기조다. 김정은은 지난해 4월 "(핵·경제) 병진 노선이 위대한 승리로 결속(結束)됐다"며 '경제 건설 총력 집중 노선'을 새로운 정책 기조로 채택했다. 여권 일각에선 '병진 노선의 종료'를 '비핵화 시작'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책은 '비핵화'가 아닌 '핵 영구 보유'가 병진 노선의 진정한 의도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책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외신을 인용해 '미국은 허망한 북핵 폐기 망상에서 깨어나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난처한 상황에 빠져들었다'고도 했다.

책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역학 관계도 완전히 변했다고 주장했다. "조·미(미·북) 대결의 전략적 구도를 완전히 변화시킨 강력한 핵 강국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화국이 강력한 핵 억지력을 보유함으로써 조·미 사이의 전략적 구도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조선에 핵 위협 공갈을 가하던 구도로부터 조선이 미국을 거세게 압박하며 최후 멸망으로 몰아가는 새로운 구도로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고 했다. 핵무기와 ICBM 개발 사실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기조가 바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북한이 싱가포르 회담 이후 '최후 멸망' 등의 표현을 써가며 미국을 비판한 것도 이례적이다.

이 책은 지난해 4월 열린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김정은의 업적으로 내세웠으나 6월 열린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은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병진 노선의 승리는 미국과 일본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과 민족 차별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핵무기 개발이 결국 미국을 협상장으로 이끌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핵무력 완성을 김정은의 최대 업적으로 강조한 건 최근 북한이 지속적으로 내비치는 인식과도 유사하다.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지난 6월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대 3주년 중앙보고대회에서 "(김정은 동지께서) 제국주의와의 결사적인 대결 속에서 병진 노선의 역사적 승리를 안아오시어 최강의 전쟁 억제력을 마련했다"고 했다. 김정은도 16일 미사일 발사 실험을 참관하며 "지난 3년간 간고한 투쟁을 벌여 핵전쟁 억제력을 자기 손에 틀어쥐던 그 기세, 그 본때대로 당과 혁명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간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 책에 비핵화 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속내가 일부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남주홍 경기대 명예교수는 "북은 전통적으로 관영 매체에서 하기 껄끄러운 말을 '조선신보' 등 조총련 매체를 통해 대신해왔다"며 "책 내용이 사실상 북한의 뜻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북한 관영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이 이 책 출간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도 이 책을 입수해 보관 중이지만, 일반엔 공개가 제한되는 '특수' 도서로 분류하고 있다. 조영기 국민대 초빙교수는 "평양에서 이런 내용의 책 출판을 암묵적으로나마 승인했다는 것은 결국 김정은이 약속한 '비핵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책 내용대로라면 북한이 한·미를 기만한 셈"이라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20/20190820001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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