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회담에서 김정은이 처음 트럼프를 만나
'사드로 시끄러운데 그걸 북조선에 배치하라'고 말하자…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올 초 나는 여권(與圈)의 한 실력자와 만나고 있었다. 대화가 한·미 동맹 문제로 옮아가자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 옹호했다. 열띤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신의 말을 제어하지 못했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김정은이 트럼프를 처음 만나 뭐라고 말한 줄 아는가. '사드로 남조선이 시끄러운데 그걸 북조선에 배치하라'고 했다. 이 한마디로 트럼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김정은이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은 중국이다. 중국만이 자기를 제거할 명분과 현실적 힘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것은 중국의 '아바타'로 봤기 때문이다. 중국이 자기를 대체할 인물로 김정남을 보호하니 독살했고…."

그는 입 밖으로 내선 안 될 '기밀'이라는 걸 깨닫자 "이건 오프 더 레코드"라고 덧붙였다. 내가 "이 자리에서 한 말은 모두 사실인가?"라며 재확인하자 "내가 한 말 중에서 사실이 아닌 게 있으면 지적하라. 단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한 말은 보도되면 안 된다. 국익을 위해"라고 말했다.

말하고 난 뒤의 일방적 '비보도' 요구였지만 받아들였다. 내 앞에서 편하게 말한 그가 난처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2차 미·북 정상회담 개최에 나쁜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몇 번이나 '만나자'고 해도 반응이 없던 김정은이 트럼프의 트윗 하루 만에 판문점에 나타난 걸 보면서 침묵의 시효가 끝났다고 판단했다. 우리 영토에서 트럼프·김정은의 회담이 열리고 문 대통령은 끼지 못하는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 국민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결국 중국을 어떻게 견제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김정은이 "북한에 사드를 배치하라"고 한 허세 같은 말 속에는 '북한이 앞으로 중국 아닌 미국 편에 서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트럼프로서는 중국을 겨냥한 군사적 압박에 북한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정은이 제 입으로 투항 의사를 밝혔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북핵 해결을 위한 싱가포르 회담의 합의문 1조에 '새로운 미·북 관계'가 명시된 것은 이 때문이다.

트럼프는 수확이 있었다고 내심 여겼지만, '맹탕' 합의문은 미국 조야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그 뒤 하노이 2차 회담을 트럼프가 깬 것은 미국 내 여론을 의식한 측면이 컸다. 보수 언론에선 '김정은의 핵 폐기는 사기(詐欺)'라고 비판해도 트럼프가 김정은을 비난한 적은 없었다. 최근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도 "별것 아니다. 북한은 약속대로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을 멈췄다"며 옹호했다.

재작년 여름만 해도 '화염과 분노'로 주석궁을 날려버릴 기세였던 그가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를 좋아하고 그도 나를 좋아한다"고 떠들어대니 묘하지 않은가. 돌변한 시점은 작년 5월 말이다. 백악관에서 북한의 김영철을 1시간 반 면담하고 큰 봉투에 담긴 '김정은 친서'를 전달받으면서다.

면담 뒤 트럼프는 백악관 집무동 밖으로 나와 북측 관계자들과 악수하고 기념촬영 했다. 탑승할 차량까지 김영철을 안내했다. 우방국 정상이 와도 이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면담과 친서가 얼마나 그를 기쁘게 했으면 그랬겠는가. 앞으로 미국 편에 서겠다는 김정은의 의사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그때 몰랐겠지만, 2007년 뉴욕을 방문한 북한의 김계관이 이미 이런 운을 뗀 적 있었다. 그는 10년 넘게 미국을 요리했던 노련한 협상가였다. 뉴욕의 한인 식당에서 그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을 만나 "미국은 왜 전략적 관점에서 북한을 안 보는가"라고 큰소리쳤다. 미국이 손을 잡아주면 북한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견제 역할을 맡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미국 측 전문가들은 독재 체제의 북한이 미국 편에 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고립 국면에서 시간을 벌고 경제 지원을 얻기 위한 술책으로 봤을 뿐이다.

실제 김계관은 미국 편에 서는 것처럼 해서 미국 협상팀을 농락해왔다. 핵 사찰이 포함된 합의문에 서명하고는 방코델타아시아에 동결된 북한 비자금을 되찾아갔다. 그 뒤로 합의문은 휴지 조각이 됐다. 은퇴한 김계관이 작년에 미국을 압박하는 성명(聲明)으로 잠깐 존재를 드러낸 적 있다. 미국에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팔던 그의 협상술이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뜻이다.

김정은이 직접 이를 다시 써먹었고, 트럼프는 그런 거래에 흥미를 보였다. 이번 판문점 만남은 미·북이 그런 이익의 접점을 찾겠다는 신호였다. 미국의 국익과 회담 목적이 우리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그 판에는 우리 자리가 없다. 구경꾼처럼 됐는데도 "사실상 미·북의 적대 관계는 끝났다"며 흡족해하는 이런 감상적 대통령과 국민은 덩달아 춤춰야 하나.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04/20190704037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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