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美北회담 이후]
북한판 엄친딸… '김일성 최측근' 최영림 前내각 총리의 수양딸
대표적 미국통… 외교 현장 20년 넘게 누벼 영어·중국어에 능통
 

지난달 30일 미·북 정상의 '판문점 깜짝 회동'이 성사되는 과정에서 두 정상만큼 주목받은 인물은 단연 최선희(55)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었다. 최선희는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을 제안한 지 약 5시간 만에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란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어 판문점 회동 준비를 총괄했고, 두 정상 간 회동 중엔 미측 실무협상 대표인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5분 이상 대화를 따로 나눴다. '대미(對美) 협상의 컨트롤타워'임을 입증한 것이다. 앞서 최선희는 지난 4월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14명으로 개편된 국무위원회(위원장 김정은)에 차관급으론 유일하게 진입했다. 4월 말 북·러 정상회담 때는 이례적으로 김정은의 벤츠 차량 옆자리에 동승했고,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대 3주년 보고대회'에선 주석단 1열에 앉았다.
 
지난달 30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북·미, 남·북·미 정상회동 현장에 모습을 나타낸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지난달 30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북·미, 남·북·미 정상회동 현장에 모습을 나타낸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이번 판문점 회동의 막후 조율을 맡았다는 최선희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의 '대미 협상 컨트롤타워'로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시스

북한 전문가들은 "최선희는 강석주·김계관으로 이어지는 '대미 라인'의 적통(嫡統)을 잇고 있지만, 과거 어떤 미국통보다도 막강하다"고 했다. 최선희가 김정은의 전폭적 신임을 얻게 된 배경엔 출신 성분과 실력 외에 '하노이 노딜'이란 외부 요인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금수저' 출신에 실력·배포까지

최선희는 슬하에 딸이 없던 최영림 전 북한 내각총리가 수양딸로 입양했다. 최영림은 1970~80년대 주석부 책임서기를 지낸 '김일성 최측근'이다. 최선희는 고위급 자제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고, 중국·오스트리아 등에서 유학했다. 1930년생인 최영림은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당시 김정은, 김영남(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이어 권력 서열 3위였고 아직 생존해 있다. 여전히 조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김정은 체제에선 최선희의 든든한 '뒷배'란 얘기다.

1990년대 외무성 통역으로 일을 시작한 최선희는 아버지의 후광 덕에 고속 승진했고, 대미 협상의 전면에 나설 기회를 남들보다 많이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한 미측 인사는 이날 본지에 "당시 북아메리카국 부국장이었던 최선희가 공식 석상에서 직속상관인 리근 국장을 대놓고 무시하는 장면도 목격했다"고 했다.

최선희는 '미국통'으로 집중 양성돼 실력도 탄탄하다는 평가다. 영어와 중국어 모두 능통하고, 1990년대부터 외교 현장을 누비며 미국 고위급 관리들을 접촉하면서 미측의 의중과 전략도 가장 잘 꿰뚫어 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외교관은 "최선희는 2000년대 6자회담에서도 통역을 맡았는데, 단순 통역이 아니라 협상단의 주요 일원이었다"며 "배포가 있으면서도 매우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했다.

◇'하노이 노딜'로 기회

최선희는 자신이 실무협상 대표로 나섰던 작년 6·12 미·북 싱가포르 회담 이후 협상이 교착 국면을 맞고, 통일전선부 라인이 득세하면서 잠시 위상이 약화되는 듯했다. 하노이 회담을 앞둔 올 1월엔 김혁철에게 실무협상 대표 자리도 내줬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위상이 달라졌다. 결렬 당일 하노이 현지에서 리용호 외무상과 함께 심야 기자회견을 열어 김정은의 육성(肉聲)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김정은이 대미 협상을 주도한 김영철의 통전부 라인을 경질하고, 최선희로 대표되는 외무성 라인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인 김성혜 통전부 통일책략실장까지 밀려나면서 여성 간부를 찾기 어려운 북한 내부에서 최선희는 '홍일점'이 됐다. 외교가에선 "하노이 노딜의 최대 수혜자는 최선희"라는 말도 나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02/20190702003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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