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北 숙소에 '영빈관' 명칭… 중국식 표현으로 비위 맞춰
트럼프 친서 공개도 北 주민에 美 숙이고 나온다는 인상 주려
'영변+α'와 대북 제재 바꿔 핵보유국 공고화 다시 하려는 것
 

태영호 前 북한 외교관
태영호 前 북한 외교관

지난주 평양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 내외를 맞이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표정은 시종일관 싱글벙글이었다. 지난해 3월부터 네 번이나 중국을 방문하여 다시 찾아가기가 뭣한데 시진핑이 평양에 찾아왔으니 중국 앞에서 작아졌던 자기의 모습을 북한 주민들 앞에서 크게 보일 수 있으니 당연히 좋아했을 심정이 이해가 된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숙소까지 평양 시민 25만명을 동원해 '환영의 꽃바다'를 바쳤으며 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훌륭한 숙소까지 새로 건설했다. 필자는 북한이 이 숙소 이름에 전통적인 북한식 표현인 '초대소' 대신 '영빈관'이란 단어를 붙인 것을 보고 놀랐다. '영빈관'이란 표현은 중국식으로 김정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작명했더라면 '사대주의자'라고 강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시진핑의 귓맛에 듣기 좋고 익숙한 중국식으로 '영빈관'이란 이름을 붙이게 했다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 김정은의 치밀함이 느껴진다.

시진핑에 대한 환영 행사 중에서 김정은이 제일 품을 들인 것은 북한 주민들이 다 볼 수 있는 금수산태양궁전광장 앞 행사였을 것이다. 북한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이 있고 중국에는 천안문 광장에 '마오쩌둥 기념당'이 있다. 북한은 김일성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영도했다고 선전하고 중국은 마오쩌둥이 영도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러한 미묘한 관계 때문에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사망한 후 북한과 중국은 정상급 교류가 여러 번 있었지만 두 나라 '수령'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천안문광장이나 금수산태양궁전광장에서 정상 환영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암묵리에 서로 피해 왔다.

김정은은 중국 정상이 '금수산태양궁전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창출하여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중국의 지원 속에 김씨 왕조를 유지해 온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김정은도 대대손손 김씨 왕조를 끄떡없이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음을 시위한 셈이다.

시진핑의 평양 방문이 끝나자 김정은은 연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보내온 친서를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는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먼저 보낸 친서에 대한 회답인데 김정은이 먼저 친서를 보낸 사실은 공개하지 않고 미국 대통령의 친서 도착 소식만 나오니 외국 뉴스와 격리되어 있는 북한 사람들에겐 미국이 북한에 숙이고 나오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정세를 긴장시킬 듯하더니 갑자기 친서 외교, 방북 초청 등으로 평화 공세로 돌아서는 김정은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당연히 하노이 회담 결렬로 흔들리고 있는 북한의 민심을 먼저 다잡자는 것이다.

김정은이 4월 12일 시정연설에서 미국과의 장기전을 예고하면서 자력갱생을 호소한 후 북한 사람들의 심리는 크게 위축되어 있다. 자력갱생을 떠들면서 걸어온 지난 70여년의 북한 역사에 지칠 대로 지친 북한 주민들에게 또다시 자력갱생으로 나가자는 것은 더는 매력이 없다. 그렇다고 김씨 왕조를 대대손손 받쳐줄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는 김정은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김정은이 동북아시아 정치의 중심에 서 있으며 조만간 대북 제재도 풀릴 것이라는 착시 현상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김정은의 전략에 미국과 한국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향후 비핵화 협상의 승패가 달려 있다. 김정은은 이번 시진핑의 방북을 통해 3차 미·북 정상회담을 성공시켜 핵보유국 지위를 공고히 하는 과정을 다시 시작해 보려 하고 있다. 지금 북한은 미국과 핵 협상에서 비핵화 과정의 선결 공정인 핵 목록 신고와 비핵화 로드맵, 비핵화 방법 등에 대한 논의를 뒤로 미루고 이미 준비해 두었던 영변 핵시설 폐기와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한 은폐된 핵물질 생산 시설을 추가 폐기 대상에 포함시키는 대신 대북 제재를 단계적으로 풀어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번 주 오사카에서 진행되는 G20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등에게 '영변+α 핵시설 폐기 대 제재 해제안'을 들이댈 수도 있다. 북한의 이러한 '단계적 합의, 단계적 이행'안을 미국이 받아 물면 결국 북한의 핵·미사일은 1기도 폐기하지 못하고 북한의 일부 과거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북한은 대북 제재에서 서서히 풀려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미국이 북한의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때이다. 미국이 북한의 새로운 타협안을 받아들이면 김정은은 북한 주민들에게 다시 한 번 만세를 부르게 할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4/20190624030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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