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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뜨거운 가슴으로 '퍼주기' 주창했지만… 네 번 방북 뒤 '反햇볕론자' 돼"
조선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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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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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첫 공식 취재한 언론인… 권영빈 前 중앙일보 사장
 

"북한을 동족의 가슴으로 보듬고 개혁·개방 노선으로 유도하면 적대 관계는 개선되고, 그것이 통일로 가는 멀고도 바른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무리를 감행하며 방북 사업을 성사시키려고 했다."

권영빈(76) 전 중앙일보 사장이 '나의 삶 나의 현대사'를 출간했다. 이 책을 보면서 그가 '광복 후 처음으로 북한을 공식 취재한 언론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중앙일보는 1997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문화유산답사'라는 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이었던 그가 이 사업의 실무 책임자였다. 이 책에는 북한 관계자와의 비밀 접촉, 방북 대가로 북한이 요구한 현금(달러) 전달과 배달 사고, 네 차례 북한 방문, 그 뒤 북한의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호출 등이 솔직하게 기록돼 있다.

비록 한 신문사의 대북 사업이었지만 여기에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모든 걸 걸고 있는 현 정권에 주는 메시지가 적잖이 있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 그러한 것처럼, 이 사업을 진행했던 그도 한때 연민과 뜨거운 가슴으로 북한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나는 '햇볕론자'였고 '대북 퍼주기 주창자'였다. 1996년 6월 북한에 식량을 보내자는 칼럼을 썼는데, 조중동 이른바 보수 언론으로선 최초의 퍼주기 글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햇볕론'을 주장했다. 홍석현 회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1996년 여름, 그는 베이징에서 금강산 개발 사업에 관여한 재일교포사업가 박경륜 삼천리 회장을 만났다. 북한 정권의 핵심부와 닿아 있는 그녀에게 "남북이 서로 만나고 이해할 시점이 됐다"며 방북 취재 사업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한 달 뒤부터 북한의 외화벌이를 담당하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소속 참사들이 참여했고, 전금철 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협상은 빠르게 진척됐다. 모두 세 차례 방북, 각각 12일 체류, 행선지, 참가인 명단 등에 대해 구체적 합의가 이뤄졌다.

"방북이 임박할 무렵인 1996년 겨울 전금철이 '쌀 보내기 성금을 내줄 수 없느냐?'고 말했다. 대가를 요구할 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거절하면 사업은 물 건너갈 게 뻔했다. 당시 MBC 등 다른 언론사들도 나름대로 북한과 접촉하는 등 방북 취재 경쟁이 불붙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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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전 사장은 “북한 비판 칼럼 게재 뒤 북측에서 홍석현 회장과 나를 상하이로 불렀다”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북한이 방북 조건으로 거액의 뒷돈을 받는다는 설이 있었지만 당사자는 쉬쉬해왔다. 북한이 얼마를 요구했나?

"액수는 밝힐 수 없다. 당초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

―책을 보니, 골프채 가방에 100달러 지폐를 담아 배를 타고 밀수꾼처럼 중국 마카오로 건너간 것으로 나오는데?

"그쪽에서 현금을 요구했다. 송금은 안 되고, 그런 아이디어를 냈던 것 같다."

―달러 밀반출로 외환관리법 위반이다. 세관 통과에서 적발될 것을 걱정 안 했나?

"세관 통과는 문제가 안 됐다. 외환관리법 위반이지만 대북 사업 성격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카오의 한 호텔에서 전금철, 박경륜, 박경륜의 사무장이라는 재미교포를 만났다. 영수증을 받을 일도 아니어서 골프채 가방만 넘겨주는 걸로 끝났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 북측으로부터 '성금이 안 왔으니 다시 보내라'는 팩스가 왔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도 어이가 없어 베이징으로 가 북한 측 참사를 만났다. 이들은 '박경륜의 사무장인 재미교포가 골프채 가방을 들고 미국으로 튀었다'고만 말했다. 보는 앞에서 주고받았는데 말이 안 되는 소리 아닌가."

―정말 '배달 사고'가 난 건가, 북한이 두 번 받아먹은 건가?

"내가 '당신네가 먹고 또 요구하는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고 하자, 서로 거친 말이 오갔다. 따져봐야 그쪽이 아니라고 우기면 아닌 것이다. '북한에 들어오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답답한 쪽은 방북을 앞둔 우리라 다시 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방북 사업이 끝나고 1년 뒤 '돈 갖고 튀었다'는 재미교포(박경륜의 사무장)가 "북한이 내 명의로 성금을 받는 바람에 미국 국세청이 내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다. 세금 납부액으로 미리 성금 일부를 챙겼지만 이걸로 모자랐다. 중앙일보가 보전해달라. 안 그러면 국정원에 고발하겠다"며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내가 '신고해라. 법정에서 이 문제를 한번 따져보자'며 전화를 끊자, 그는 성금 관련 사실을 정말 국정원에 신고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어서 국정원은 이 문제를 덮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방북 성금을 두 번이나 지불했으니, 그 뒤 방북은 순조롭게 이뤄졌나?

"1997년 2월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6월에야 '방북 초청장'이 전달됐다. 7월 8일 분단 최초로 남북한 당국의 정식 허가를 받고 방북 길에 올랐다. 하지만 베이징에 도착해 일주일 기다렸지만 북한 대사관에서 입국 불가(不可) 통지를 했다. 허탕만 치고 그냥 돌아왔다."

―무슨 이유가 있었나?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두 달이 지나 북한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해서 9월 23일 평양행 고려항공을 탈 수 있었다."

―그렇게 기대했던 북한에 대한 첫인상은 어떠했나?

"북한의 첫 이미지는 잿빛이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40여분 동안 창 밖의 풍경은 잿빛으로 보였다. 하늘이 흐려서가 아니라 길 가는 사람들의 낯빛과 옷차림이 잿빛이고, 등에 지고 있는 식량 보따리가 잿빛 덩어리로 느껴졌다. 그때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던 '고난의 행군'의 끝자락이었을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북한 취재 결과는 만족스러웠나?

"자유로운 취재가 막혀 있었다. 북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 봤다. 그게 연출된 장면인지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차 타고 지나가면서 그냥 산천경개를 구경했던 셈이다. 묘향산호텔 식당에서 평소 허세를 보이던 북측 수행원들이 우리가 먹다 남은 식탁에 모여 게걸스레 먹는 장면을 우연히 보고 말았다. 가슴이 찌르르했다. 당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고급 유치원에 갔을 때도 그랬다. 화장실을 찾느라 뒷마당으로 가니 빨랫줄에 남루한 아이들 옷이 걸려 있었다. 우리를 맞이할 때 입던 옷과는 딴판이었다. 그런 단편적인 인상만 남아 있다."
 
북한 입국 비자.
북한 입국 비자.

당초 계약된 북한 답사는 3차로 끝났지만, 두 달 뒤인 1998년 8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홍라희(이건희 회장 부인)씨를 위한 추가 방북이 이뤄졌다.

"북한에서도 원했다. 중앙일보 뒤에 있는 삼성을 보는 것 같았다. 당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에는 현대와 삼성 담당이 있었다. 현대를 맡은 쪽에서는 1998년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성과를 거뒀다. 삼성은 TV 조립공장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성을 담당한 김철 부위원장이 '삼성은 돌다리를 두드리며 올 듯 올 듯하다가는 돌아선다. 어찌 그 모양인가'라며 노골적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마치 작년에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던 우리 기업 총수들에게 이선권 조평통 부위원장이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라고 윽박지르던 상황과 유사했다."

―홍석현 회장 일행은 대북 사업과 관련해 북한에 어떤 약속을 해줬나?

"그 내용은 잘 모르겠다. 다만 북한의 대접이 각별했다. 월북 작가 이기영의 아들인 이종혁 당시 조평통 부위원장이 직접 영접했다. 그는 아침마다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홍 회장 일행 앞에서 두 손 모으고 '어젠 야당의 반대로 산업합리화 법안이 통과하질 못 했습니다'라는 식으로 전날 남한 뉴스를 요점별로 보고했다. 북한 대남 총책의 입을 통해 남한 소식을 매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북한에서 총 한 달 반 체류했다. 방문 전과 후를 비교하면 북한을 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었나?

"처음엔 연민 또는 부채감이 있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북한에 접근했던 셈이다. 하지만 접촉할수록 북한은 '현실'로 다가왔다. 북한의 개혁·개방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 됐다. 모든 답사가 끝나고 불과 보름도 안 돼 북한이 '광명성 1호'를 발사했을 때는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의 북핵, ICBM 문제와 연결되는 시발점이 광명성 1호였다."

당시 그는 '광명성이 가야 할 길'이라는 제목으로 북한 비판 칼럼을 썼다.

〈광명성이란 김정일에게 붙여진 별호였다. 1994년부터 '광명성 총국'이라는 단체가 외부 세계에 알려지면서 광명성은 대남 경제 창구의 대명사가 됐다. 정무원 대외경제위에 속하면서 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종합무역상사처럼 잡화점식 무역 거래를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기구였다. 외화벌이 사업 과정에서 비리가 생겨났고 남한의 정보기관 돈에 놀아난 '매국노'가 있어 이들을 처형했다는 소문이 들린 뒤 광명성 총국은 해체됐다. 그런 광명성이 이번 발사 위성의 공식 명칭이 됐다….〉

―칼럼이 게재되고 보름쯤 지나 북한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고 했는데?

"홍석현 회장과 나를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만나자는 팩스가 왔다. 무슨 용건인지 모르고 갔다. 북에서는 이종혁과 김철이 나와 있었다. 김철이 '공화국이 당신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을 안겨줬는데 소장이라는 자가 우리를 비판하는 글을 버젓이 발표할 수 있나. 그것도 광명성 별명을 지닌 최고지도자를 향해 이게 말이 되느냐'며 소리쳤다. 이게 홍 회장과 나를 상하이까지 불러낸 용건이었다."

이 황당한 만남이 있고서 북한과의 관계는 일단락됐다.

"나는 '반(反)햇볕론자'로 바뀌었다. 교류협력을 하고 지원해본들 북한 정권은 바뀌지 않는다고 믿게 됐다. 물론 전쟁보다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다. 북핵 제거를 위해 남북 화해·협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달성하려면 현실적이고 이성적 접근을 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핵과 생화학 무기로 위협하는 북한을 '우리 민족끼리로' 접근하고 있다. 평화협정과 군사합의로 무장 해제를 진행 중이다. 국가 보위의 최종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정작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17/20190617000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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