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일러스트= 안병현

한국으로 올 때 나와 아내는 빵집이든 세탁소든 하나 운영하면서 애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나 잘하면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3년이 다가오는 요즘, 대학 2학년인 아이들이 졸업한 다음 뭘 하면 좋을지 벌써 고민이다.

통일 문제를 고민하는 '남북 동행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한국 대학생들을 곁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가장 큰 고민이 졸업 후 진로였다. 취직 때문에 학교 공부엔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한 통계 자료를 보니 대학생 중 대학원 등으로 진학하겠다는 학생이 10% 정도이고 창업을 원하는 학생이 3.2% 정도라고 한다.

인기 직종도 북한과는 많이 달랐다. 희망 직종 중 하나가 교수라는 점이 특히 눈에 띄었다. 북한에선 교수가 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당에서 강제로 교수를 임명해 버릴 정도다. 내 경우엔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할 때 영어 담당 교수가 자기와 함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자며 조교 명단에 넣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정말 난처했다. 하는 수 없이 저녁에 술상을 차려 교수 댁에 찾아가 제발 명단에서 빼달라고 사정사정했다. 술상 덕인지 다행히 교수가 나를 명단에 넣지 않은 덕분에 외교관으로 배치될 수 있었다.

요즘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니는데 대학들이 진로 교육, 창업 지원을 위한 현장 실습, 인턴 등 다양한 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취직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일 테다. 그런데 취직 걱정하는 한국 대학생들이 내 눈엔 그저 부럽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진로를 자유 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자기 직업을 자기가 선택할 수 없다. 대학 입학 때 전공 희망 과목을 신청할 수는 있지만 전공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는 대학 당국이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싶어도 대학 측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라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당에서 직종을 결정해 배치하면 그 직업을 따라야 한다. 취업 시장도 없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고시 제도도 없다. 고시가 있으면 하층 계급 자녀도 열심히 공부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해진다.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나 하층 계급 자녀가 국가 지도층으로 대거 들어오면 북한 체제 자체가 붕괴할 수 있으므로 이런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신분은 태어나면서 정해진다. 결국 직업 결정의 자유가 태어날 때부터 박탈되는 셈이다.

한국에선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고 한다. 좋은 직장의 기준이 높은 임금, 탄력적인 근무 시간, 복지 등이라고 한다. 소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되는 회사의 인기가 점점 높아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북한에선 출신 성분이 좋은 학생들이 힘들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거나 권력을 쥘 수 있는 직종에 가려고 한다. 대학생 임명 인사권을 가진 이들에게 뇌물을 줘 좋은 직업을 가지려고들 한다. 경쟁이 아니라 임명제이니 자기보다 학업 성적이 나쁜 친구가 더 좋은 직종에 배치되어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다. 이런 구조 탓에 북한에서 대학생 임명 배치 담당자들은 뇌물의 왕초들이다.

지금 북한의 20·30대는 정치 이념이나 체제에는 관심이 없다. 대학에서 배운 철학이나 정치학, 경제학 등은 지금의 북한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어 쓸모없는 학문으로 여겨진다. 김일성종합대학 같은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택시 기사 등 돈 잘 버는 직종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전공은 무의미해졌다.

취직난에 힘겨워하는 한국 대학생, 직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북한 대학생. 장래를 둘러싼 남북 젊은이들의 고민은 전혀 다른 빛깔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31/20190531018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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