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6·25전쟁이 휴전선을 중심으로 고착되면서 소강상태를 보이던 1952년 12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김일성은 1952년 11월 27일 내각 제24차 전원회의에서 행정체계와 행정구역 개편방침을 천명했으며 다음달 2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북반부지역에 있어서의 행정체계 중 면(面)을 폐지함에 관하여」라는 정령을 발표해 행정구역 개편을 법적으로 뒷받침했다. 기존 행정단위 가운데 면을 폐지함과 동시에 군(郡)을 세분하고 리(里)를 통합하며, 군의 중심 리를 읍으로 부르기로 한다는 것. 공장·광산·어촌의 리 가운데 성인 주민이 400명 이상 되고 그들의 65% 이상이 임금노동에 종사하는 리를 노동자구로 설정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내각은 12월 27일 지방 행정구역 개편사업 실행에 관한 내각 결정 제22호를 채택해 구체적인 사업방법과 내용을 확정했다. 또한 내각 산하에 행정구역 개편의 실무를 담당할 「지방행정구역개편실행 중앙지도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본격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착수했다.

행정구역 개편작업은 1952년 말 시작돼 큰 어려움 없이 이듬해 초에 전반적으로 완료됐다. 이에 따라 도(특별시)-시(구역)·군-면(읍)-리(동)의 4단계 행정체계가 도(직할시)-시(구역)·군-리(읍·동·노동자구)의 3단계로 축소 조정됐다. 군(郡)은 91개에서 168개로 늘어나고, 리(里)는 1만120개에서 3659개로 통합 정비됐다. 군 중심지에 168개의 읍이 설치되고, 41개의 노동자구가 신설됐다.

이 즈음 행정체계와 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한데 대해 북한은 기존 행정체계의 불합리성을 예시하고 있다.

군의 지역적 관할범위가 너무 넓은 반면 리는 지나치게 세분돼 있었다는 것이 그 하나다. 당시 군은 평균 1430㎢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역적 편차가 심했다. 6216㎢나 되는 군이 있는가 하면 433㎢짜리 군도 있었다. 인구도 최대 18만7600명에서 최소 2만5700여 명까지 천차만별했다. 함남 영흥(현 금야)군은 268개 리를 가진 반면 함북 온성군은 28개 리밖에 되지 않았다. 사정은 리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결정·지시가 리(동)까지 내려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시기를 놓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도가 시·군을, 시·군이 면을, 면이 리(동)을 지도하는 행정체계 아래에서 행정의 신속성을 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불필요한 사무기관과 비생산부문의 인력이 늘어나는 등 비능률이 심화된 것도 행정체계와 행정구역 조정의 필요성을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김일성은 1952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아직 조국이 통일되지 못하였는데 국가행정기구는 전 조선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났으며 아직 도시와 농촌에 개인경리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관리기관은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관리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났다』고 개탄했다.

1952년 12월 단행된 행정체계·행정구역 개편의 골격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은 9도, 4직할시(평양 개성 남포 라선), 24시(31구역)·146군, 2구(청남·수동), 2지구(금호·운곡), 4000여 개의 리(읍·노동자구·동)으로 되어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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