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일러스트=안병현

요즘 버닝썬 사건과 연예인 마약 문제로 시끄럽다. 한국이 동북아시아에서 마약범이 제일 적은 마약 청결 지대라고 알고 있었던 나로서는 충격적이다.

북한 당국도 마약 문제로 골머리 앓는 건 마찬가지다. 북한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고 있는 마약은 ‘아이스’다. 얼음 조각처럼 보인다고 이렇게 부르는데 한국에서 필로폰(메스암페타민)이라 부르는 마약이다. 뉴스를 보니 한국에서도 필로폰을 ‘아이스’라는 은어로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북한에서 마약 문제의 기본 책임은 김씨 가계에 있다. 1970년대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김정일은 아버지 눈에 들기 위해 여러 가지 김일성 우상화 사업을 벌였다.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해외 공관들에 ‘충성의 외화벌이 운동’을 지시했다. 그 책임자로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이 나섰다. 각 대사관에서는 현지 실정에 맞게 코뿔소, 위스키, 담배, 시계 등을 밀매했는데 제일 쉽게 돈을 많이 벌어 바친 대사관들이 스웨덴, 덴마크,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관이었다. 중동 등에서 가져온 마약을 이들 나라에 밀매하는 것이었다. 마약을 팔아 번 달러를 상자에 넣어 북한으로 보냈다. 국가 표창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1978년 스웨덴 주재 북한 대사였던 길재경이 마약 밀매로 적발돼 추방당한 데 이어 덴마크,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외교관도 같은 이유로 줄줄이 추방됐다. 김정일은 이들을 처벌하면 전반적인 외화벌이 운동이 위축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길재경 대사를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시켰다.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김정일은 1980년대 후반 마약 밀매 등 외화벌이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대신 북한에서 아편을 대대적으로 재배해 해외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양강도 대홍단 종합 농장과 함경북도 백암종합농장에서 대규모 아편 농사가 시작됐다. 당시 북한에서는 양귀비 재배 사업을 ‘백도라지사업(White Bellflower)’이라고 불렀다.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김정일은 ‘자력갱생’ 구호를 들고 공장 자체에서 생존 방도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이 구호를 제일 먼저 받든 것이 함경남도 흥남에 있는 제약 공장 지배인이었다. 제약 공장에서 아이스를 대량 생산해 중국에 넘겨 번 외화를 김정일에게 바쳤다. 공장 굴뚝에서 노란 연기가 매일 피어올랐는데, 사람들이 그 노란 연기를 보면서 달러가 대량 생산되는구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공장 지배인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노력영웅 등 상이란 상은 다 받았고 자력갱생의 본보기가 됐다. 그런데 이 지배인이 중국에서 마약을 팔고 돌아오다 국경 세관에게 수색당했는데 짐 속에서 한국 영화 수십 편이 나왔다. 그는 즉시 체포되고 중앙당에선 검열대를 흥남시로 급파했다. 현장에 가봤더니 해외 판매용이었던 아이스가 이미 북한 간부와 주민들에게 흘러들어가 있었다. 결국 지배인은 총살당했다.

그제야 마약이 북한 사회 깊숙이 퍼져 있었단 사실을 안 김정일은 유통책들을 체포해 총살하겠다고 엄포 놨지만 소용없었다. 함흥시를 중심으로 민간에서도 아이스를 생산하고 있었고, 전국에 아이스 유통망이 형성돼 있었다. 운전사들은 졸음 운전을 방지하려고, 일부 학생은 시험 기간에 집중력을 높이려고 아이스를 복용하고 있었다.

일부 언론은 북한 주민이 마약의 유해성을 잘 모르고 오히려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북한 내부에서도 마약 근절을 위해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주민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김정은 대에 들어와선 마약을 체제 위협의 가장 큰 요소로 보고 ‘사상 의식을 마비시키는 독소’라고 부를 정도다. ‘마약 하는 인간 쓰레기들을 쓸어버린다’며 공개 총살하기도 한다. 2013년 장성택이 처형될 때 죄목 중 하나도 마약 복용이었다. 적어도 수령의 사위는 마약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북한 주민들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김정은이 대북 제재 장기화에 대비해 김정일 때처럼 ‘자력갱생’을 다시 외치고 있다. 그러한 자력갱생이 1990년대처럼 마약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6/20190426020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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