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 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선순환,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 강화 등 한반도 평화 질서를 만드는 데 책임과 역할을 다하겠다"며 "앞으로도 필요한 일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노이 노 딜' 이후 우리 정부의 '중재자론'은 사실상 미·북 양쪽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미 상원은 "한국은 미·북 사이의 중재자가 아닌 미국의 동맹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고, 김정은은 "오지랖 넓은 촉진자, 중재자 행세를 그만하고 민족의 이익을 위한 당사자가 되라"고 했다. 북핵 피해자인 한국이 가해자인 북한 편을 들라는 것이다.

'오지랖이 넓다'는 것은 '앞장서서 주제넘게 간섭한다'고 비아냥대는 말이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쓰기 힘든 말이다. 김정은이 문 대통령에게 '오지랖 넓다'고 한 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김정은은 문 대통령의 활동이 필요할 때는 세 번 끌어안는 사회주의식 인사법으로 애정을 표현하더니 문 대통령 말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먹혀들지 않자 면박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그런 모욕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이 김정은 요구대로 '중재자' 표현을 빼고 '한반도 운명의 주인'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김정은의 '서울 답방'을 장담하더니 어제는 "북의 여건이 되는 대로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남북 정상회담을 하겠다"고도 했다. 대화를 위해 유연한 자세를 보이는 것과 국가수반으로서 원칙을 지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변함없는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어디에 그런 대목이 있나. 김정은은 "근본 이익과 관련한 문제에선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3차 미·북 정상회담을 한 번 더 해볼 의향은 있다면서도 "하노이 회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얻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은 자신이 하노이에서 제시했던 '고철화된 영변 폐기와 핵심 제재 해제를 맞바꾸는' 교환에서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미국보고 입장을 바꾸라고 한 것이다. 이게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인가. 무엇을 높게 평가한다는 것인가.

한국은 북핵 위협의 가장 큰 피해자인 만큼 북핵 폐기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려면 막연한 '희망 사고'를 버리고 냉철하고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내 정치적 목적을 갖고 북핵 외교 문제를 다루지 말아야 한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는 것은 남북 이벤트에 다음 총선, 대선 승패가 달려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은 아닌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5/20190415029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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