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基

강경하게 대립하는 것으로 보였던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누그러질 수도 있는 전기(轉機)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국무부의 잭 프리처드(Pritchard) 대북협상 특사가 지난 11~12일 서울을 다녀갔다. 북한과의 협상을 위한 방북을 앞두고 한국과 협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8~9일 이틀간 도쿄(東京)에서는 한·미·일 3국의 외교부 국장급 실무책임자들이 모두 모여 ‘대북정책 조정·감독 그룹(TCOG)’ 회의를 가졌다. 임동원(林東源) 청와대 특보가 대통령 특사로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자마자 사전 계획대로 열린 것이었다. 회의 후 발표된 것 가운데 하나가, 프리처드 특사가 두어 달쯤 후에는 북한을 방문하리라는 것이었다. 대북협상 특사가 임명된 지 1년여 만에 비로소 ‘직함’에 맞는 활동에 나설 기회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임 특사는 방북 직전에 주한 미국대사관의 토머스 허버드 대사와도 만났다. 한국 정부는 이번에는 임 특보의 방북에 관해 북한과의 막후 협의 외에 미국·일본과도 상당히 긴밀한 사전·사후 공조(共助)를 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의 대화 방침을 밝히고 프리처드 특사의 방북도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나, 일본인 납치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보이는 일본과의 적십자 회담에도 응하겠다고 밝힌 것은 다 이런 한·미·일 공조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연두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킨 이래 한반도에 조성됐던 긴장 상황, 즉 임 특보의 방북을 불러왔고 북한 측이 ‘민족 앞에 닥친 엄중한 사태’라고 표현했던 국면은, 북한이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풀려나갈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최근 몇 대목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면 부시 행정부의 대북 입장도 반드시 강경 일변도만은 아닌 듯하다는 점이다. 부시 자신부터가 2월 방한 때는 ‘악의 축’이란 표현을 피했고,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확언했다.

워싱턴에서는 부시 행정부보다 훨씬 더 강경한 주장도 없지 않다. 가령 상원 외교위원회의 짐 도란 전문위원이 3월 25일자 ‘위클리 스탠더드’에 기고한 글은 부시 행정부에 대해, ‘북한 체제 붕괴’를 공공연한 희망사항으로 선언하고, 식량 등 일체의 대북 지원을 중단하며, 북한 주민들의 탈출을 고무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국무부의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은 3월 27일 “우리는 북한의 체제 변화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변화를 원한다”거나 “탈북을 촉구하는 것은 더 고려해 봐야 할 문제”라는 등의 말을 했다. 부시는 방한 때, 미국이 최대의 대북 식량 지원국이라면서 북한과 대화가 되든 안 되든 식량 지원은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입장은, 가령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군비경쟁을 벌인 결과가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든가, 지금 부시가 이라크에 대해서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를 원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지난 2월 환갑을 맞은 김정일에 대해 “지금이야말로 김 위원장이 굶주림과 경제파탄만 초래한 과거와 결별하고 북한 주민들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야 할 때”라며, “김 위원장에게는 지금 기회가 있으며, 이것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미래지향적 변화’를 보인다면 미국이 정말로 북한을 돕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지금, 핵무기 개발과 대량살상무기 문제로 유발된 ‘악의 축’ 발언 이후 느껴온 ‘위기’의 해소는 물론, 나아가 여러 모로 실리를 얻을 수도 있을 소중한 ‘기회’를 맞고 있다.
/ 국제부장 chang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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