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 공로훈장' 받은 한국계 영국인, 박석길씨
 

보름 전 본지 연재물인 '윤희영의 News English'에서 '대영제국 공로훈장(MBE) 받은 한국계 영국인' 박석길씨에 관한 외신 보도를 짧게 소개했다. 북한 주민을 1000명 이상 탈출시키고 한국 정착을 돕는 활동으로 영국인 명예를 드높였다는 것이다.

수소문해보니 그는 미국에 본부를 둔 북한인권단체 '링크'의 한국지부장으로 서른다섯 살의 젊은이였다. 서울 을지로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석길씨는“북한이라면 김정은과 핵무기를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관심 둬야 할 대상은 2500만 명의 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석길씨는“북한이라면 김정은과 핵무기를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관심 둬야 할 대상은 2500만 명의 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우리는 북한에 대해 김정은이나 핵무기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관심을 둬야 할 대상은 2500만명의 북한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굶주린 아동을 돕는 것이 그 나라만의 이슈가 아니듯, 억압과 통제 속에 있는 북한 사람 문제는 한국만의 이슈가 아니라 인류의 이슈입니다."

그가 몸담은 '링크(Liberty in North Korea)'는 2004년 재미교포 대학생 연합회에서 만든 것이다. 미국 정부의 지원은 한 푼도 안 받는다. 세계 각국 대학에 링크 동아리가 있고 후원자 수는 6000명이 넘는다. 2012년부터 한국 지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북한 주민의 탈출과 정착을 도왔다. 한국 지부에는 직원 7명이 일하고 있었다.

"영상물 제작이나 행사를 통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북한에 산다'는 사실을 미국 등 서방 사회에 알리고 있습니다. 아직은 북한 주민을 돕는 외부 지원 세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지원 단체가 생겨날 수 있도록 돕는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국 맨체스터 출신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집안의 뿌리는 함경북도에 있었다. 해방 직후 그의 할아버지는 서울로 내려왔는데 6·25 중 사망했다. 할머니는 그 뒤 영국인과 재혼해 영국으로 갔다.

"서울에서 출생한 아버지도 1968년 영국으로 건너와 정착했습니다. 아버지는 가계(家系)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한국 소식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BBC 방송에 어쩌다가 한국 관련 뉴스라도 나오면 큰 소리로 우리 형제를 불렀습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연세대 어학당에서 1년간 공부했다. 그 뒤 영국 워릭대에 진학했고, 대학 졸업 후 다시 한국으로 와서 1년간 일했다. 런던정경대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6·25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관해 공부했다고 한다. 석사를 마치고 2009년 뉴욕 유엔본부에서 인턴십을 할 때 '링크'의 후원 행사에 참석했다. 그게 탈북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전까지 북한에 대한 관심은 순전히 학구적인 관심이었어요. 북한은 정치·외교·안보·문화·역사 조작·선전 선동 등 모든 면에서 흥미로운 나라였어요. 너무 특이하고 극단적인 나라였으니까요. 그런데 링크 행사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면서 학문 대상이 아니라 현실로 인식하게 된 겁니다."

―인턴십이 끝나면 유엔에 정식 직원으로 근무할 계획이 아니었습니까?

"유엔이나 영국 외교부에 들어가는 걸 생각했는데 진로가 바뀐 겁니다. 제 유엔 상사(上司)도 '나이 들어 다시 와도 된다. 유엔은 도전적인 젊은이가 있을 자리는 아니다'라고 격려해줬어요. 유엔은 안정된 직장이고, 그 조직에는 충분한 인력이 있습니다. 제가 들어가 일해도 임팩트가 없어요."

―유엔에서는 더 큰 무대에서 활동하거나 다른 기회가 있었지 않을까요?

"오히려 작은 조직에서 일해야 젊은 나이에 좀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북한 사람 문제를 해결하려는 분야에는 인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해외에서 그렇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아는 나 같은 사람이 쓰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나이 또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조직과 안정된 자리를 찾는 법인데.

"제가 잘난 척하는 것이 되는데, 하하. 사람은 한 번 사는데, 그냥 살고 죽는 게 아니라 인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서는 제가 기여할 몫이 별로 없어요. 북한 문제는 인류의 당면 과제이면서,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나 별로 관심을 못 받은 '틈새시장'입니다."

―그 결정에는 집안의 뿌리가 얼마간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조부님과 같은 고향 출신인 탈북자를 만나면 '혹시 내 친척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 형제는 9형제였고 두 분만 내려왔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척은 잘살고 있고 마음먹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친척은 단지 거기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만날 수 없고 몇 명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역사가 다르게 흘렀으면 나도 북한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본인이 북한에서 태어났을 수야 있겠습니까?

"하하, 저는 '반반(半半)'이니까. 아버지가 북한에서 태어났으면 나도 거기서 태어났을지, 아니면 영국인 엄마 따라 영국에서 태어났을지 알 수 없지만요. 어쨌든 운 좋게 저는 영국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가정은 특별한 게 없지만 영국에 태어난 이유로 저는 글로벌한 시각을 갖게 됐어요. 마찬가지로 한국의 사촌들도 그런 면에서 운이 좋았던 거죠."

―재벌 부모를 못 만나 원망하는 인간 부류 얘기는 들었지만…. 어쨌든 그런 발상이 흥미롭군요.

"영국에는 '다른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여기다 놓았다. 이는 운명이다'라는 종교적 격언이 있어요. 제가 영국에서 태어난 것은 제 힘이나 제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운명이었어요. 마찬가지로 북한 사람들도 자신의 잘못으로 거기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운 좋게 태어난 사람들이 운이 안 좋게 태어난 북한 친척들에게 손을 내밀어야지, 나만 잘살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렸던‘링크’행사.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렸던‘링크’행사.

―우리 젊은이 중에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지 여기서 태어난 것을 운 좋게 여기지는 않아요.

"완벽한 것은 없는데 한국 사람들은 자신에게 잘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아요. 젊은이의 불만은 지금 사회가 더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바깥에서 보면 한국은 지난 50년 동안 놀라울 정도로 정치·경제·사회 변화와 성취를 이뤘습니다. 실제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쪽은 북한 주민입니다. 같은 사람인데 이들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고 알지 못하고 공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북한 사람 중심'이 아닌 '안보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핵과 미사일을 개발한 북한에 대해 '안보 중심'으로 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는 북한 정권이 만들어놓은 프레임(구도)입니다. 북한은 핵무기 등으로 협상 거래를 해서 체제 유지를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프레임에 갇혀 북한 정권이 원하는 의제를 갖고 만납니다."

―북핵은 실재하는 위협이고, 우리로서는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이슈 아닌가요?

"비핵화 협상이 중요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관심권 밖에 밀려났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인권 유린이 이뤄지고 있는 북한 현실은 논의조차 되지 않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실상을 바깥세상이 알지 못하게 막아버린 겁니다. 북한 정권이 자신 있는 부분은 핵무기 같은 '하드 파워'이지만, 이를 공략해야 할 수단은 '소프트 파워'여야 합니다. 북한 사람 중심의 접근이 북한 정권을 압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작년 판문점에서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현 정권은 '금방 봄이 올 것'처럼 홍보했지요.

"근본적인 체제 변화 없이 제스처가 바뀐 것을 북한 정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합니다. 강화된 국제 제재를 풀기 위해 태도 변화를 보인 거겠죠. 하지만 김정은이 체제 유지를 하려면 북한 주민의 눈치를 봐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경제 발전을 해야 합니다."

―북한과의 정상회담에서 정치범 수용소와 인권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고 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문제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기피하고, 트럼프 정부도 생각이 다른 데 있습니다. 설령 정부 간의 핵 협상이 진전돼도 북한 주민의 삶은 그대로일 수 있지요.

"맞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 변화의 엔진은 시장 경제와 외부 정보의 유입입니다. 바깥에서 북한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활동과 노력이 지속돼야 합니다. 저는 탈북자야말로 북한 내부 변화의 촉진제라고 봅니다. 한국에는 탈북자가 3만명쯤 있습니다. 이들 절반이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거나 통화를 합니다. 북한 내부에 경제나 의식적인 면에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다고 봅니다."

―탈북자 구조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저는 직접 현장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2년 전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로 막 빠져나온 탈북자와 화상 통화를 한 적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김정은과 관련된 정치적인 견해를 물었습니다. 그는 당황하며 '여태껏 한 번도 그런 얘기는 해본 적 없다'라며 답변을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었으면 그것 없이 사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북한에서는 그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짠했습니다."

―우리의 기대처럼 김정은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 것으로 봅니까?

"제가 김정은과 동갑(同甲)입니다. 북한 체제에서 그는 장기 집권하는 걸로 돼 있는데 그렇다면 길게 봐야 합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북한만 이렇게 낙후된 상태로 갈 수 없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점점 의문을 표시하면 체제 유지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통했던 이데올로기나 선동 선전 수단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지난 50년간 한국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50년은 한반도 전체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젊은 친구를 만나면 내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27/20190127015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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