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금지구역 설정하면 작전 훈련 할 수 없고 장병의 生死 걸렸는데
"난 반대하지 않았다" 내세우는 해병대 사령관… 누구 위한 사령관인가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한 달 전 본지 1면에 '해병대, NLL 비행 금지 추진에 반대'라는 단독 기사가 실렸다. 국방부가 9·19 남북 군사 합의 후속 조치로 검토 중인 동·서해 북방 한계선(NLL) 및 한강 하구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해병대(海兵隊)가 반대 의견을 밝혔다는 내용이다.

그날 국방부 대변인실은 "해병대가 반대했다는 보도는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악의적 보도"라는 반박 자료를 냈다. 국방부의 조직 생리를 이해해도 '악의적' 단어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백령도와 연평도에 병력을 둔 해병대로서는 NLL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반대하는 게 상식이다. 북한의 개머리 해안에서 연평도까진 13㎞ 떨어져 있다. 해안포 사정권에 놓인 데다 북한군의 공기 부양정으로 기습 상륙할 수 있는 거리다.

남북 군사 합의에 따르면 이제 백령도와 연평도 주둔 해병대는 해상으로 포(砲) 한 방 쏠 수 없다. 자주포 K-9는 무용지물이 될 운명이다. 비례 원칙에 따라 북한의 해안 사정포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북한은 후방으로 해안포를 빼 사격 훈련하고 들어올 수 있다. 이런 상황에 비행금지구역까지 적용되면 공격용 헬기 코브라의 사격 훈련도 불가능해진다. 이 헬기가 배치된 것은 연평도 포격을 당한 뒤였다. 물론 최악 시나리오를 가정한 것이지만, 비행금지구역으로 묶이면 도발 상황에서 서해 5도는 완전히 고립된다. 주둔 장병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해병대가 이런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어느 정도까지 반대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보도가 있은 뒤 한 보수 단체에서 "남북 군사 합의를 반대한 해병대 사령관은 구국의 영웅"이라고 느닷없이 추켜세웠다. 해병대가 소신 있게 해달라는 기대가 담겼겠지만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 해프닝은 그렇다 치고, 정작 필자를 당혹스럽게 만든 사건은 그 뒤에 일어났다.

'구국의 영웅'으로 거론됐던 당사자 해병대 사령관의 등장(登場)이었다. 그는 김포 해병사단을 방문해 "내가 전혀 언급한 바 없는 NLL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반대한다는 '가짜 뉴스'가 유포되고 있는데 절대 사실 아니다, 해병대는 남북 군사 합의를 적극 이행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토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대 장병 훈시를 하는 형식이었지만 사실은 국방부와 청와대를 향해 들으라는 소리였다. 그가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사실관계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부하들의 눈을 보면서 그런 공개 부인을 하는 그가 놀라웠다. 자기 예하 병력이 작전과 훈련을 할 수 없고 거기서 문제가 생기면 수도권이 뚫리게 되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내세우는 해병대 사령관이라니…. 그가 과연 누구를 위한 사령관인지 혼란스러웠다.

그와 함께 근무한 선배 예비역 장성은 "외압에 의해 자신의 뜻과 다르게 면피용 발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 논리로 그 고충을 백번 이해하려고 해도, 군(軍) 최고 지휘관은 재벌 회사의 봉급쟁이 사장과는 다르다. 해병대에서 허세(虛勢)만 단련했나.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며 사표를 던진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진퇴보다 더 못하지 않은가. 그가 말없이 전역서를 냈으면 비록 나라를 구하지는 못해도 전통 있는 조직의 명예는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평양에서 이뤄진 남북 군사 합의에는 치명적인 안보 독소 조항이 들어 있다. 가령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면서 북한보다 월등한 우리의 항공 전력과 정찰 자산 운용이 제한됐다. 대북 감시망에 구멍이 뚫리게 된 것이다. 군 수뇌부는 적의 움직임을 아는 게 한반도 평화 유지의 조건임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현역 장군 중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남북 군사 합의에 따라 파괴한 비무장지대 GP의 철조망으로 액자를 만들어 전방 시찰에 나선 여당 의원들에게 선물로 돌린 사단장은 있었다.

청와대 행정관이 인사 문제 협의로 육참총장을 불러냈을 때 청와대의 오만과 횡포가 도마에 올랐지만 실상 더 매섭게 질책받아야 할 대상은 육참총장이었다. 왜 별 4개나 달았는지, 계급 값을 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정치판에 뛰어들어야 정치군인이 아니고 정치권력에 알아서 기는 것도 정치군인이다.

2006년 말 노무현 대통령 이 민주평통자문회의에서 이런 품위 없는 말을 했다.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깁니까…." 그때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쓴 것이었지만, 어쨌든 군의 자존심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 스스로 우습게 만들면 옆에서 아무렇게나 발길질하는 것이다. 아무리 별을 주렁주렁 달아도 자신의 처신으로 군인답게 살고 있는 후배 장교와 병사까지 욕먹일 권한은 없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17/20190117031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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