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思派에서 북한인권투사로… 이광백 국민통일방송·데일리NK 대표
 

이광백(49)씨는 대북 전문 언론 매체인 국민통일방송·데일리NK의 대표다. 인터뷰는 한 달 전 사건으로 시작했다.

김정은의 서울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결성된 '백두수호대' 소속 회원들이 "태영호 전 공사의 칼럼을 더는 싣지 말라"며 피켓과 유인물을 든 채 그의 사무실을 항의 방문한 적 있었기 때문이다.

"선글라스를 쓴 남학생 둘과 여학생 한 명이 왔습니다. 제가 주사파(主思派)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 때문에 이 학생들이 너무 안쓰럽게 생각됐습니다. 같이 얘기를 해보자며 회의실로 안내했지만 '우리가 말하려는 내용은 유인물에 있으니 대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그냥 가버리더군요."

그는 원광대 재학 시절 북한의 남한 내 지하당인 민족민주혁명당 전북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RO(혁명조직)의 교육선전국장을 맡아 북한의 대남(對南) 방송에 나오는 김일성 회고록, 주체사상 강좌 등을 받아 적어 배포했다고 한다. 1998년 그는 치열한 논쟁 끝에 주사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이데올로기의 맹인(盲人)'이었음을 고백했다. 그 뒤로 북한민주화운동에 합류해 '시대정신' 편집장을 맡았고 2005년부터 대북 방송에 몸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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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백 대표는 “사회주의 운동권이 내세운 인권과 사상의 자유는 이데올로기의 마스크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학생 방문객이 소속된 '백두수호대' 단체는 최근에 등장했는데?

"황선·윤기진 부부 그룹에 속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현재로는 이 그룹에서 김정은 환영 활동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평양 원정 출산' 의혹을 받았고 재미교포 신은미씨와의 '종북 토크 콘서트' 논란을 불러온 황선 전(前) 민노당 부대변인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2014년 '국민통일방송'이 통합 발족됐을 때 북한에서 대여섯 차례 비방 논평을 냈습니다. 그러자 바로 이 그룹에서 지금처럼 여기에 항의 방문했습니다. 이 그룹은 그동안 '민권연대' '6·15실천연대' 등으로 활동하다가 이번에 '백두수호대' 명칭을 썼습니다. 이름만 그때그때 달라질 뿐 같은 그룹이고, 인원은 얼마 안 됩니다."

―김정은의 서울 답방에 찬성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위인맞이환영' '백두칭송위원회' 같은 용어를 골랐는지?

"저도 '위인' '칭송' 같은 표현이 궁금했는데, 작년에 북한에서 '범세계위인칭송축전'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북한의 '3대 위인'은 김일성·김정일·김정숙(김일성 처)이었는데, 작년 대회에서 김정숙을 빼고 김정은을 넣었습니다. 아마 그걸 본떠 이 그룹에서 '위인' '칭송' 용어를 쓴 것 같습니다."

―북한을 따라 했다는 뜻이군요. 서울 중심인 광화문에서 그런 환영 행사가 열리는 걸 보고는 많은 사람이 격세지감을 가졌을 겁니다. 이를 사상과 표현의 자유로 봐야 할지, 아니면 실정법인 국보법 위반으로 봐야 할지…, 검찰 공안부가 이렇게 방관하는 것도 새로운 현상입니다.

"국보법은 거의 사문화된 것 같습니다. 이들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가면(假面)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북한 전체주의 정권의 하수인, 사상적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김정은의 서울 답방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자기 눈으로 직접 우리 사회를 한번 보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현 정권이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이벤트 쇼'로 만드는 게 걱정이지만.

"내려와서 무얼 얻어 갈 수 있는지 확실한 게 없어 김정은이 결정을 못 하고 있을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변화를 이끌 생각이 정말 있는지, 아니면 회담 이벤트나 관계 개선으로 지지율을 올리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김정은에게 '핵 포기' '개혁·개방' 등 지향점을 분명하게 해줘야 합니다."

―비핵화 진전이 안 되면 유엔 제재에 막혀 현 정권이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습니다. 김정은의 신년사에는 전략국가(핵보유국)로서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는데요.

"태영호 전 공사에 따르면 북한은 2016년 당대회를 끝낸 뒤 핵협상 기초 전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비핵화가 아니라, 핵보유국이 되면서 경제 제재를 어느 정도 풀 수 있는 전략을 짰습니다. 적당히 핵 협상을 끌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제재도 느슨해져 중국과 교역만 해도 체제 유지를 할 수 있다는 쪽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미국과 한국 대선 결과를 보고 유화 국면을 활용하자며 나온 게 평창올림픽 대표단 파견과 남북 교류 실현을 담은 2018년 김정은의 신년사였습니다. 알다시피 그 뒤로 남북 관계가 빠르게 진행됐던 겁니다."

―당초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김정은은 비핵화 의사를 밝혔다'고 전한 것은 국민 상대로 거짓말을 한 격입니다. 현 정권의 대북 담당자들이 북한이 이런 식으로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몰랐겠습니까.

"대화 국면과 관계 개선을 위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넘어갔다고 봅니다."

―정상회담 의제로 '북한 인권 문제'도 채택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요. 하지만 문 대통령은 '관계 개선이 되면 북한 인권의 진전이 이뤄진다'고 말했지요.

"내 경험으로 사회주의 운동권이 내세운 인권이나 사상의 자유는 이데올로기의 마스크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인권과 자유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무자비한 사회주의 계급 혁명에서 인권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정권과 싸우기 위해 민주 투사로 가장하는 것이지요. 인권 변호사 출신인 문 대통령이나 핵심 세력이 북한 인권 문제에 고민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북한이 정말 개혁·개방하려면 외국 자본과 기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현행 법·제도를 바꿔야 합니다. 외부 정보 유입과 여행의 자유도 허용해야 합니다. 이는 세습 독재 체제를 흔들 수 있는데, 김정은이 과연 그런 변화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김정은은 변화를 택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는 장마당의 확산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하지만 정치·사상적 통제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외부 정보를 더욱 차단하고 당 권력 강화와 백두 혈통 강조에 힘쓰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혁 ·개방이 아니라 중국과의 교역만으로 인민 생활을 안정시켜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기형적 형태로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광백 국민통일방송·데일리NK 대표와 최보식 선임기자

―김정은이 치밀한 전략을 갖고 문 대통령을 요리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는데요.

"김정은에 대해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정권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지, 어떤 노회한 각본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근거로 이렇게 분석합니까?

"노무현 정부 시절 보수 우파 운동이 처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사파였던 제게 얘기를 듣기 원했습니다. 저는 좌파 운동을 보는 이들의 시각에 놀랐습니다. 좌파의 실상에 무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좌파 운동을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했습니다."

―우선 무엇을 과소평가하던가요?

"좌파가 집회나 행사를 할 때 우파의 관제 집회처럼 돈을 주고 동원하는 비도덕적인 방법을 쓰는 걸로 봤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나, 좌파 운동권의 문화는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면이 있습니다."

―과대평가한 부분은요?

"당시 좌파의 전략은 부재했습니다. 저 역시 천편일률적으로 대남 방송을 듣고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게으르고 무능한 조직이었습니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후에도 치열한 논쟁과 대안이 없었습니다. 과거의 미련에 빠져 사상적으로 나태하고 전략적으로 게을렀습니다. 그런데도 좌파는 치밀한 전략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때문에 북한과 협상해 본 전문가들은 '북한은 3대 세습을 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 통일전선전술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북한은 해오던 것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북한이 과거와 다른 면을 보이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내몰려서 하는 선택에 지나지 않습니다. 탁월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국민통일방송은 뉴스·문화·예능 등으로 두 시간짜리 프로그램 파일을 매일 제작해 대만국제방송에서 보내고 있다. 대만 송신소를 통해 우회적으로 북한에 보낸다. 연간 2억~2억5000만원의 송출비를 지불한다. 방송 제작 및 송출 경비의 90%를 미국 민주주의진흥기금(NED)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정상회담으로 북한과의 화해 무드로 가고 있는데 이런 대북 방송이 분열·이간시킨다고 현 정권 지지 세력은 보지 않겠습니까?

"과거 정부에서는 대북 방송 주파수 할당이나 콘텐츠 제작에 관한 논의가 이뤄졌지만 현 정부 들어 중단됐습니다. 우리 같은 활동을 지원하는 통일부 북한인권과도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전 세계 유례없는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북한 내부의 상황이 변하지 않은 채 교류 협력에 의한 통일은 가능할 수 없습니다. 북한 내부를 지원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라디오 방송이 그런 내부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습니까?

"우리 방송만으로는 안 됩니다. 외부의 다양한 세력과 동력이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북한은 규모가 작고 닫힌 사회라 외부 작용이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피드백이 없으니 성과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허공에다 헛되게 뿌리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나 구체적인 보람을 느껴야 일을 지속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직원들의 평균 월급이 160만원 선으로 들었는데, 생활인으로서 이는 현실적인 문제 아닌가요?

"이게 정말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나마 학생운동을 해본 사람들은 이 일이 옳다는 신념 하나로 근근이 버텨나가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이 뜻을 갖고 참여했다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성과를 측정할 수 없기에 지쳐서 이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 정권 들어 국민통일방송·데일리NK의 직원은 30명에서 20명으로 줄어들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6/20190106017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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