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와 함께 대형 시계가 자정을 가리킨다. 이어 금빛 조명을 받은 북한 노동당 청사를 비추더니 김정은 위원장이 등장한다. 짙은 색 양복 차림이다. 아마도 '북한 유일'의 고도 비만인 그는 뭘 입어도 맵시가 안 난다. 바지를 치맛자락처럼 펄럭이는 걸음걸이는 자연스레 팔자(八字)가 된다. 녹음된 박수 소리 속에 그가 당도한 곳은 의외로 카펫이 깔려 있고 벽면이 책으로 빼곡한 응접실 같은 공간이다.

▶새해 첫날 아침 공개된 김정은의 신년사 모습은 여러 화제를 낳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김정은은 단상에 서서 읽었다. 올해는 김일성과 김정일 대형 그림이 걸린 방 가죽 소파에 앉아 프롬프터와 원고를 번갈아 읽었다. 이곳은 처음 공개됐는데, 이른바 '3층 서기실' 어딘가로 보인다고 탈북 인사들은 말했다. '3층 서기실'은 김정은을 근접 보좌하는 북한 노동당 조직이다. 
 
[만물상] 서양 쇼 김정은

▶김정은 뒤로는 인공기와 노동당기가 깃대에 걸려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 공사는 "서구 따라 하기"라고 했다. 특히 트럼프 따라 하기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실내에 깃발을 세워놓지 않는다고 한다. 소파에 앉아 발표하는 것 자체가 서구식이라고 했다. 그가 앉은 소파는 영미권의 전통적 클럽이나 라운지에 있는 '체스터필드 스타일'이다. 벽 장식을 본 인테리어 전문가는 '신(新)고전주의' 양식이라고 했다. 상부·하부를 분명히 구분한 나무 벽장이 전통과 권위를 드러내려는 듯하다. 김일성·김정일 사진은 둘 다 정면 대신 서류를 보고 있다. '일하는 지도자'를 강조하는 장치다. 사진 밑 벽면의 월계수 잎 모양 문장(紋章) 역시 서양식 권위를 흉내낸다.

▶김정은은 북한 특유의 만연체로 연설했다. 32분간 계속된 신년사에서 그는 "석탄이 꽝꽝 나와야 할 수 있는" 화력발전부터 "물고기잡이 투쟁"까지 시시콜콜 들먹였다. 무엇을 "틀어쥐고" "억세게" 해야 하며 "단단히 각오를" 해서 "된바람"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에 "가혹한 경제 봉쇄"를 비난한 뒤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했다.

▶김정은이 김정일과 다른 것은 서구식 쇼를 한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스위스 유학을 함께 한 여동생과의 합작품일 것이다. 그런데 쇼는 서구식으로 하고 통치는 전근대 전제 군주식으로 한다.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한다. 심지어 외국 청년이 호텔에서 벽보 가져가려 했다고 거의 고문해 죽이다시피 했다. 김정은도 새해 서른다섯이 됐다. 이제 국정도 서구 흉내를 조금이라도 냈으면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2/2019010203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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