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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 외환위기 음모론의 망령
조선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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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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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참 직관적이네."
옆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서는 길이었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다는 뜻으로 들렸다. 좋게 말하면 직관적이지만 솔직히 너무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극장가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이야기다. 전반적으로는 수준급 영화다. 외환위기 당시 서민들이 겪었던 고통과 절망을 비교적 잘 묘사했다. 중소기업 사장 한갑수(허준호)를 중심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부도, 파산, 해고, 자살 등의 어두운 기억을 생생하고 현실감있게 되살렸다.

반면 주인공인 한시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김혜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는 너무 작위적이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서라지만 지나친 왜곡과 과장이 많다. 주인공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재정국(재정경제원) 차관을 ‘악의 화신’으로 그린 게 단적인 사례다. IMF 구제금융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자아내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또다른 사례 중 하나. 한시현이 팀원들과 함께 ‘국가 부도후 한국 경제 예측 보고서’를 만들고 기자회견을 했다. 정부가 그동안 국민들을 속였고, IMF와의 협상이 한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들에 이런 내용이 단 한줄도 실리지 않았다.

언론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속된 말로 쌍팔년도식 인식이다. 주인공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강조하기 위한 설정일 것이다. 하지만 실소가 나올 정도로 억지스럽다. 영화 막바지에 주인공의 오빠로 밝혀진 한갑수 등의 사연을 다룰 때와 정반대다.

외환위기의 원인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들다.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5개국에 흘러들어간 2000여억 달러의 단기차입금 문제를 비롯해 내부 요인과 외부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터졌을 일이라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영화는 재벌과 결탁한 재정국 차관이 고의로 국가 부도 상황을 방치했고, IMF도 끌어들인 것으로 그렸다. IMF 구제금융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이 있었는데도 이를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 해고와 중소기업 부도 등 외환위기의 고통은 모두 일부 경제 관료와 재벌, IMF와 미국에 그 책임이 있다고 몰아붙였다.

영화는 외환위기 전개 과정을 철저히 선과 악의 대결로 단순화하고, 음모론적 시각으로 해석했다. 일일이 팩트체크를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게 부질없을 정도로 억지와 왜곡이 심하다. 극적인 재미가 반감될 정도로 불편하고 어설펐다.

당시 정부 대응이나 IMF 처방이 최선은 아니었다. 영화처럼 정부가 아무 생각 없이 넋놓고 있다가 위기를 맞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이한 판단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잘못이 있다. 당시 정부는 한국 경제 특히 민간 부문이 글로벌 경제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응이 서툴렀고, 실책이 적지 않았다.

IMF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민간 기업의 외화 차입으로 인한 국가 부도 위험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에 맞는 처방이 없었다. 훗날 IMF 스스로 반성했듯이 한국에 대한 정책 처방에는 과도한 부분이 있었다. 10년 뒤 금융위기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위기 예방과 진단·처방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더 나아지는 수밖에 없다.

구제금융 협상 타결 이후 벌어진 사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은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 그때까지 IMF 역사에서 최대 규모였다. 한국 정부가 당초 요청한 금액보다 2배 정도 많았다. 위기를 해소하려면 시장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원해야 한다는 ‘충분성의 원칙’이 처음 적용됐다.

시장 반응은 전혀 달랐다. 1997년 12월 5일 IMF 자금 55억 달러가 처음 들어오자 모든 채권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돈을 빼기 시작했다. IMF 자금 덕분에 110억 달러로 늘었던 외환보유고는 30억 달러대로 줄어들었다. IMF와 미국도 예상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한국이 IMF 지원을 받고도 국가 부도가 나는 첫 케이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노심초사했다.

결국 미국 정부가 비상조치를 취했다. 재무부와 연준(Fed) 간부들이 주요 은행 CEO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한국에서 돈을 빼지 말도록 설득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났다. 미국, 일본, 유럽 등 8개 선진국 은행들이 일제히 자금 회수를 멈췄다. 한국은 가까스로 국가 부도를 면했다.

당시 한국을 담당했던 가이트너 미 재무차관보는 회고록에서 "우리는 한국이 무너질 경우 투자자들이 어떤 신흥국도 안전하지 않다고 결론지을 것으로 우려했다"고 밝혔다. "민주주의 국가인 남한의 붕괴를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이 어떻게 활용하고 나설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과 대립한 경제 관료와 IMF 총재, 그 배후의 미국을 ‘절대악’으로 묘사하고 있다. "IMF 협상을 중단하고 국가부도를 선언해야 한다"는 궤변을 펴기도 한다. 고용불안과 빈부 격차 같은 작금의 모든 경제문제가 IMF 구제금융에서 비롯됐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뇌 송송 구멍 탁’을 방불케하는 선동이고 기만이다.

음모론은 명쾌하고 단순하다. 아무리 복잡한 현상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흔히 말하는 ‘사이다’ 비슷하다 . 그러나 음모론으로 보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다. 진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아무 교훈도 얻을 수 없고 문제의 해결책도 구하지 못한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한번은 비극으로 그 다음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을 덧붙였다. 외환위기를 둘러싼 흑백논리와 음모론의 망령은 바로 그 ‘희극’의 씨앗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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