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4.27 남북 정상 회담)’ 분위기는 가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다시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연기된 후 제재의 고삐를 조이는 미국과 제재를 완화하라는 북한의 요구가 맞서면서 북미 간 샅바 싸움이 거세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은 정보기술(IT) 분야 교류의 작은 물꼬를 텄다. 11월 23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남측 5명, 북측 5명이 참가한 통신 실무 회담을 열고 남북 직통 회선을 구리 케이블에서 광케이블로 개선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북미 협상이 교착 상태라 남북 직통 회선을 광케이블을 바꾸는 것도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 위반인지 아닌지 검토해야 할 정도로 조심스럽다.

남북 간 작은 대화라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기조 아래 차기 남북 통신 회담에선 ‘퀄컴(Qualcomm) 스토리’를 소재로 토론해 볼 것을 제안한다. 이 흘러간 옛날 이야기를 두고 토론하는 것은 대북 제재 대상이 아니라서 우선 정치적, 외교적 부담이 적다. 반면, 북한 정권이 그토록 원하는 ‘IT 단번 도약’에 필요한 실체적 노하우가 들어 있어 영양가는 ‘만점'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통신 반도체 기업인 퀄컴의 성장사를 이야기하려면, 한국의 전자통신연구원(ETRI)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1985년 여러 국책 연구소가 합병해 출범한 한국전기통신연구소가 오늘날 ETRI다. 연구소는 삼성, LG, 현대 등 민간 부문의 연구소가 보잘것없던 시절, TDX(전자식 전화 교환기), 4메가 D램 반도체 등을 극적으로 개발한 한국 첨단 기술 연구의 첨병이었다. 백미(白眉)는 연구소가 미국의 작은 벤처 기업에 불과했던 퀄컴을 발굴하고 이 회사와 함께 CDMA라는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퀄컴은 세계 2차 대전 때 군사용으로 쓰이던 기술을 이동통신에 적용하는 연구에 몰두했다. 특허는 내놓은 상황이었지만 기술의 완성도는 낮았다. 여느 벤처처럼 돈도 없었고 연구 인력도 많지 않았다. 퀄컴은 한국 국책 연구소 ETRI의 기술 협력 제안을 반겼다. 반면, 상종가를 달리던 모토로라는 콧대를 높이며 한국의 연구소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ETRI의 선택은 모험이었다. 퀄컴과 기술 협력 계약을 체결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퀄컴 사무실에 한 해 30~40명씩 연구원을 파견했다. 돌이켜 보면, 한국이 없었다면 퀄컴은 CDMA 기술 상용화 시기를 놓쳐 망했을 것이다. 또 한국은 퀄컴이라는 모험을 무릅쓰지 않았다면 ‘휴대전화 강국’ ‘반도체 강국’을 이끈 인력들을 양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퀄컴 스토리를 파면, ‘창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엘리트 공무원과 연구원을 만난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 간 만찬에 참석한 직후 사석에서 "대북 투자 경쟁에서 한국의 최대 경쟁력은 국가를 발전시켜 본 공무원들이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한국말로 전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북한 투자 기회가 열렸을 때 미국, 중국, 일본 등이 퍼부을 자본의 규모를 고려하면 ‘쩐(錢)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오랫동안 사업을 해온 기업가의 직감으로 북한이 한국과 손을 잡게 하는 한국의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한 것이다.

제재 해제로 경제 개발을 시작한 쿠바가 재정 적자와 빈부 격차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공 분야의 불투명성과 제도 미비(未備) 탓이다. 올해는 주 수출품목인 설탕의 수출량도 전년 대비 40% 감소했고 관광객 수도 쿠바 정부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고 있다. 북한한테 쿠바의 최근 사례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이고 퀄컴 초기 성장 스토 리는 한국 정보통신 산업의 발전 비결을 엿보는 암묵지(暗默知)다. ‘북한판 퀄컴 스토리'를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남북 통신 회담에서 격의 없이 이야기 해보자. 한가지 사족을 붙이자면, 폴 제이콥스 퀄컴 회장의 아버지인 어윈 제이콥스 전 퀄컴 회장 겸 창업자는 북한에서 CDMA 사업을 하기 위해 2002년 한미 외교 당국자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