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개별 기업에 전화… 美, 시중은행 7곳 이어 직접 압박
은행들 "美, 사내 北연구센터·통일동호회까지 알고 활동 물어"
 

국내 대기업들이 지난주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미) 재무부의 의뢰로 곧 대북 사업 계획에 대해 콘퍼런스 콜(전화회의)을 진행할 예정이니 관련 자료 준비 등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취지의 전화를 받은 것으로 31일 확인됐다. 전화를 받은 기업들은 지난 9월 평양 정상회담의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최고경영자(CEO)들이 방북한 삼성전자, SK그룹, LG그룹, 현대차 그룹, 포스코그룹 등이었다.

앞서 미 재무부는 지난 9월 국내 시중은행 7곳에 전화해 "북한과의 금융 협력 재개는 미국의 정책과 불일치한다"며 대북 제재 준수를 강력 요구했다. 미국이 대북 정책과 관련, 우리 정부를 통하지 않고 우리 은행·기업들을 직접 접촉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철저한 대북 제재의 이행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민간 기업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한 것"이라고 했다.

미 대사관의 전화를 받은 기업들은 "정부 요청으로 방북단에 참석했는데 우려했던 사태가 발생하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모 기업 고위 임원은 "미 대사관이 우리 정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접촉에 나서는 게 이례적이라 바짝 긴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앞으로 미 재무부가 직접 조사에 나서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무슨 말 했을까 -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스티븐 비건(맨 왼쪽)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조 장관 오른쪽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무슨 말 했을까 -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스티븐 비건(맨 왼쪽)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조 장관 오른쪽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오종찬 기자
이 기업들은 "방북 과정에서 남북 경협 관련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유엔의 대북 제재뿐 아니라 미국의 독자 제재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했다. 주요 대기업들은 방북 전부터 "CEO가 방북하면 미국이 주목할 수밖에 없다"며 "북한에 가면 미국 정부에 찍히고, 안 가면 한국 정부에 찍히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했었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KDB산업은행의 동향에도 관심이 많다"며 "이동걸 회장의 방북 당시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했던 이 회장은 리룡남 북한 내각 부총리 앞에서 "산은은 쉽게 말하자면 남측의 돈줄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개발 등에 정책 자금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미 재무부의 경고를 받은 국내 은행들도 매우 예민해진 상태다. 미 재무부가 특정 은행이 대북 제재 위반 활동을 했다고 판정하면, '주요 자금 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해 달러 거래 중지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러 거래를 못 하면 정상적인 은행 업무를 할 수 없어 파산하게 된다.

최근 미 재무부와 접촉한 시중은행들은 "미국이 개별 은행의 대북 관련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깜짝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미 재무부 담당자는 KB금융지주 내 KB금융경영연구소 산하에 지난 5월 설치한 북한 연구센터의 설립 목적을 문의하면서 대북 제재는 아직 유효하다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은 통일 연구 동호회인 '북한을 연구하는 CoP(Community of Practice)'에 대한 문의를 받았다. 이 동호회는 사내 동아리 성격의 모임인데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최근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미 재무부는 농협은행에 영업 중단 상태인 금강산 지점의 현황과 영업 재개 추진 여부에 대해 문의하고 대북 제재 준수를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방북 기업들뿐 아니라 재무부의 표적이 된 은행들이 극도로 위축된 상태"라며 "남북 경협 이슈에 자신들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더라"고 했다.

주요 방북 기업인들이 지난달 23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열린 '고려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회는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동행한 특별수행단의 친목 모임이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의 주도 아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 여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당시 대기업 총수들의 불참을 두고 재계에선 "여권 유력 인사들이 자꾸 '남북 경협 역할론'을 제기하니깐 부담을 느낀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1/20181101003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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