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석 파리특파원
손진석 파리특파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내년 즉위를 앞둔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를 미리 축하한 방식이 인상 깊었다. 지난달 마크롱은 나루히토를 베르사유궁으로 초청해 일본 전통 공연 노가쿠(能樂)를 함께 관람하고 국빈 만찬을 했다. 이보다 더 극진한 환대는 하기 어렵다. 일본과 프랑스의 우호 관계는 한류(韓流) 바람으로 흔들기 어려울 정도로 뿌리 깊다. 파리에서 일본문화원 연면적은 한국문화원의 9배쯤 된다. 프랑스와의 무역 규모는 일본이 우리의 2배다.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유럽 주요국과 관계에서도 우리는 일본의 바깥에서 맴돈다. 그게 엄연한 현실이다. 스페인만 하더라도 올해 일본과 수교 150주년을 맞았다. 68년 된 우리와는 역사의 깊이가 다르다.

이런 유럽을 상대로 아셈(ASEM) 정상회의를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동시에 '외교전(戰)'을 벌였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을 믿고 "먼저 대북 제재를 완화하자"고 강조했고, 아베는 "유엔 대북 제재 결의안의 완전한 이행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지난 15일 마크롱과의 정상회담에서 제재 완화 이야기를 꺼내자 마크롱은 고개를 저었다. 그후 이틀 뒤 엘리제궁을 찾아온 아베에게 마크롱은 "대북 제재 결의안의 이행이 중요하다"며 힘을 실어줬다. 두 정상은 파안대소하며 친근함을 과시했다.

아베는 이미 전날 마드리드에서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를 만나 북핵과 관련해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고 온 터였다. 메르켈 독일 총리, 메이 영국 총리의 반응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결국 19일 아셈 정상회의에서 51국 정상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로 북핵을 제거해야 한다는 성명을 내면서 문 대통령은 코너로 몰리는 모양새가 됐다.

돌이켜보면 우리 정부가 유럽을 쉽게 본 것 아닌가 싶다. 럭비공처럼 튀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비해 유럽 국가 정상들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미·북이 밀고 당기기를 하며 시간이 늘어지는 와중에 유럽에서 돌파구를 만들겠다는 계산도 얹어졌을 법하다. 하지만 철저히 실리 위주인 미국보다 유럽은 도덕적 당위성까지 엄정하게 따지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까다로울 수 있다는 걸 간과한 것은 아닐까.

트럼프는 북핵 해결을 자신의 성과로 삼 으려고 하지만 유럽은 한 발 떨어져 좀 더 냉철하게 보고 있다. 힘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대북 문제와 관련해 미국을 제치고 앞서 나가려는 유럽 국가가 있을 리도 만무하다. 결국 북한을 신뢰할 만한 아무 근거를 찾지 못하는 유럽 정상들 앞에서 문 대통령은 헛심만 쓴 꼴이 됐다. 우리 대통령이 유럽에서 가는 곳마다 일본 총리에게 밀리는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23/20181023040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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