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거래 의혹'으로 조사받는 전·현직 판사만 80여 명
법관들 침묵할수록 공격 거세져… 도망 못 가는 '칠면조' 될 건가
 

정권현 논설위원
정권현 논설위원
'칠면조는 싸우다가 형세가 불리해지면 갑자기 목을 쭉 빼고 땅바닥에 드러눕는다. 이긴 칠면조는 누워 있는 놈 주변을 빙빙 돌며 위협적 자세를 보일 뿐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칠면조가 인척 관계인 공작과 맞붙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칠면조가 공작보다 힘이 세고 덩치도 크지만, 날렵한 공작한테는 늘 당한다. 칠면조가 평소 싸움 룰(rule)에 따라 바닥에 드러누우면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공작은 무방비 상태의 칠면조를 계속 쪼아 죽이는 경우도 있다. 공작이 칠면조의 몸짓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의 저서 '솔로몬의 반지')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법원장을 지낸 원로 법조인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서 '김명수 사법부'를 공작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칠면조 신세에 비유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되풀이된 검찰과 법원의 갈등이나 사법부 내부 갈등이 '룰'을 지키면서 칠면조끼리 벌인 싸움이었다면, 5개월째 이어지는 이번 사법 사태에는 지금까지 적용된 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공작이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법원 자체 조사에서도 사실무근으로 결론 난 이른바 '재판 거래 의혹'이 검찰 수사로 이어져 전·현직 판사 80여 명이 검찰에 불려 나가 조사받고 있다. 사법부가 독립된 나라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정부 시절 양승태 대법원이 재판 거래 시도 문건을 만든 것은 부적절하고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사법부 독립을 스스로 허무는 사법부의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 거래는 문건상 '시도'에 그쳤을 뿐, 상당수는 시도도 하기 전에 확정판결이 나왔다. 이미 끝난 재판에 개입할 수도 없으니, 당연히 판결에 영향을 미친 사실도 찾지 못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하자 특정 성향 판사들이 사법부를 틀어쥐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판사를 사찰한 의혹이 있다면서 재탕 삼탕 조사를 밀어붙였다.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타깃을 바꿔 재판 거래 의혹을 제기했고 대법원장이 괴담(怪談) 수준의 의혹에 편승해 '양승태 사법 농단 프레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작금의 사태는 김 대법원장이 자초한 일이다. 대법원장에 지방법원장 출신이 파격 발탁된 데는 그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사법 개혁을 적당히 생색 내려다가 일이 너무 커지자 혼비백산한 것인가? 아니면 '촛불 검찰'이 너무 집요해 부담을 느끼는 걸까?

이른바 '재판 거래 문건'에 등장한 전교조 등 재판 이해 당사자들의 판결 불복 움직임이 봇물을 이룬다. 심지어 대법원이 유죄를 확정하고 헌법재판소가 '북한식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위헌 정당'이라고 판단한 구(舊) 통진당 깃발까지 대법원 앞에 나부끼고 있다. 대통령의 적폐 청산 요구에 머리를 조아려 화답했지만, 우물쭈물하는 그의 리더십 부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사법부 내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대법관 출신의 판사가 출근길에 민노총에 봉변을 당해도, 대통령의 일개 법무 참모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현직 고법 판사를 대놓고 비난해도 찍소리 못 하 고 있다.

공작의 공격에 노출된 칠면조는 스스로 일어나서 도망칠 생각을 못한다고 한다. 많이 맞을수록 칠면조는 순종 반응에 더욱더 단단히 죄어들기 때문이다. 사법부 구성원들이 침묵을 지키면 지킬수록 외부의 사법부 공격은 더욱 공격적이고 대담해질 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묵묵하게 재판 업무에 종사하는 대다수 법관이 생존 본능을 느끼고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22/20181022034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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