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아일랜드 여기자 베로니카 게린은 어린이까지 마약에 찌든 아일랜드 사회를 추적해 고발했다. 마약 거물의 한 차례 총격 테러에서 살아난 뒤에도 그녀는 계속 기사를 썼다. 결국 서른여덟 살 게린은 괴한에게 총알 여섯 발을 맞고 숨졌다. 이걸 계기로 아일랜드는 마약과 대대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아일랜드 정부 청사 앞에 게린의 동상이 세워졌다.

▶사우디아라비아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실종된 지 18일 만에 사우디 정부가 사망을 인정했다. 카슈끄지가 터키의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정부 요원들과 말다툼하다가 우발적으로 숨졌다고 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이다. 그런 발표를 입증할 증거는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시신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외신은 카슈끄지가 손가락이 잘리는 고문을 당한 뒤 토막 살해 당했다는 증언과 정황을 보도했다. 
 
[만물상] 암살되는 기자들

▶국제 언론인보호위원회(CPJ)는 올 들어 취재 중 숨진 기자가 44명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 62%인 28명이 암살됐다. 이 비율이 최근 높아지고 있다. 주로 분쟁 지역이나 구 공산권에서 심각하다. 푸틴 치하 러시아에서도 여러 기자가 피살됐다. 먼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북한은 작년 8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를 "임의의 시각에 임의의 장소에서 공화국 형법에 따라 추가 절차 없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영국 기자들이 북한에 대해 쓴 책을 신문에 소개했다는 이유였다. 불과 6개월 전 김정은의 이복형을 화학무기로 살해한 그들이다.

▶카슈끄지는 얼마든 편하게 살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우디 초대 국왕의 주치의였고 삼촌은 세계적 무기중개상 중 큰손인 아드난 카슈끄지다.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그는 그러나 기자의 길을 택했다. 오사마 빈 라덴과 한 살 차 친구였으나 빈 라덴이 테러로 기울자 그와 멀어졌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민중 혁명을 지지하면서 사우디 왕실의 미움을 샀다. 작년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미국 언론에 기고하며 왕실을 비판해왔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집권한 뒤 그의 폭정을 비난한 것이 죽음을 불렀다는 게 정설이다.

▶권력은 비판받지 않으면 잘못된 길을 가기 쉽다. 속성이 그렇다. 그런데 권력 비판은 너무 위험하다. 욕설·매도를 당하고, 신상이 털리고, 망신을 당하고, 고립되고, 심지어 죽음을 맞는다. 그래도 그 일을 하는 기자들이 있다. 베로니카 게린은 죽음을 무릅쓴 기사를 쓰며 말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21/20181021016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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