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이후 미국 정부는 ‘FFVD’라는 새로운 용어를 꺼내들었다. FFVD는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를 말한다.

정상회담 전만 해도 미국 정부는 ‘CVID’를 목표로 내세웠다. CVID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를 뜻하는 용어로, 미국 정부가 10여 년간 지켜온 원칙이다. 백악관은 "미·북 정상회담의 최우선 과제는 북한의 CVID"라 했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정상회담 며칠 전 "CVID만이 우리가 용납할 수 있는 회담 결과"라고 했다.

그러나 6·12 미·북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에는 CVID가 빠지고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CD)’란 용어만 들어갔다. 폼페이오 장관은 회담 하루 뒤 공동성명에 ‘검증 가능한(V)’과 ‘되돌릴 수 없는(I)’이란 말이 없다는 질문에 "질문 자체가 모욕적"이라면서도 "‘완전한 비핵화’는 ‘검증 가능한’과 ‘되돌릴 수 없는’을 아우르는 내용"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가 정상회담 이후 첫 방북을 앞두고 들고나온 것이 FFVD다. 북한이 경기를 일으키는 CVID란 말을 피하면서 비핵화의 핵심인 검증이 빠졌다는 비판을 의식해 FFVD란 새 용어를 쓰는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북한을 달래려고 비핵화 원칙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지적과 북한의 용어 혼란 전술에 넘어간 것이란 비판에도 미국 정부는 약 4개월간 FFVD를 고수하고 있다.

한동안 묻힌 듯 했던 CVID가 다시 등장했다. 이번엔 유럽에서다. 유럽 순방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와 영국에 대북 제재 완화를 요청했으나, 프랑스·영국 정상은 유엔의 원칙인 CVID를 강조했다. 북한이 CVID를 하기 전까진 제재를 풀 수 없다며 사실상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문 대통령을 포함한 아시아와 유럽 51국 정상이 참석한 아셈(ASEM) 정상회의 의장성명도 북한에 모든 핵무기를 CVID 방법으로 폐기할 것을 촉구했다.

청와대는 우리 정부가 써온 ‘완전한 비핵화’와 CVID는 실질적 의미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용어 자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비핵화란 같은 대상을 두고 굳이 서로 다른 용어를 가져다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국제사회가 합의한 큰 틀에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