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재무부가 지난달 남북 정상회담 직후 한국 은행들에 직접 연락해 대북 제재 준수를 요청한 사실이 국감장에서 공개됐다. 미측은 국내 국책 및 시중은행 7곳에 대북 관련 사업 현황을 묻고 "너무 앞서가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경고다. 미 전문가들은 "만약 (한국 은행들이) 북한과의 거래에 관여한다면 미 정부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주말 주미 대사는 국감에서 미 조야(朝野)로부터 '한국이 너무 남북 관계에서 과속하고 있다. 제재를 강화해야 북한이 핵 포기 협상에 나올 것 아니냐'는 항의를 받았다고 시인했다.

미국이 한동안은 대상 국가가 어디인지 밝히지 않고 "대북 제재를 허물지 말라"고 하더니 요즘 들어서는 아예 한국을 적시해서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미 국무부 부차관보는 이례적으로 서울에서 남북 경협 기업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일부 예외 인정을 대북 제재 해제로 오인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급기야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한국은 미국의 승인이 없이 (제재 해제와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대북 제재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은 미국이 한국을 사실상 '제재 구멍'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만의 시각이 아니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유럽 순방 관련 기사에서 "한국에서 대북 제재를 낮추는 방안이 공개적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문정인 안보특보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 대통령이 프랑스에 오는 것은 북한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고용 참사가 벌어지고 저성장 늪에 빠져드는 나라의 경제부총리가 IMF, 세계은행 총재와 만나 "북한이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니 한국을 그렇게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 정부는 올 초부터 평창 올림픽, 이산가족 면회, 남북 군 통신선 복구 등을 계기로 인물·연료·물자 등의 이동에 관해 제재 예외를 인정받았다. 미국도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성 등을 감안해 눈감아 준 것이다. 그러나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 정부가 계속 남북 경협 사업에 속도를 내려 하자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있다.

미국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제재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것은 김정은의 '핵 없는 한반도' 약속을 실천에 옮기도록 만들 지렛대가 제재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과의 관계가 환상적"이라며 대북 협상에 대해 낙관론에 빠져있는 트럼프 대통령마저 "무언가를 얻지 않고는 제재를 풀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핵의 직접적인 위협 대상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해야 할 말을 대신 해준 셈이다. 그런데 거꾸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대북 제재를 허무는 요주의 국가로 취급받고 있다. 기막힌 현실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4/20181014015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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