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시절 '완장부대'에게 "5度 오른쪽으로 보면 균형을 찾게 될 것…"
그런 그가 언제부턴가 "극우 보수 세력을 철저히 궤멸시켜야…"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노무현 정부 시절 서울지하철과 LG칼텍스정유 노조 등이 파업에 들어갔다. 민노총 산하 항공노조도 들썩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해찬 총리는 기자간담회를 갖고 "높은 소득을 받는 일부 정규직 노조가 불법 쟁의까지 하는 것은 법률적 측면이나 사회 상규상으로 볼 때도 옳지 않다. 고소득 노조가 불법 쟁의 하라고 재야 시절 내가 노동자들에게 노동교육을 시켰던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노조에 단호했다.

어려운 과제였던 방폐장 시설을 경주에 유치시킬 때도 그가 총지휘했다. 그와 함께 일해본 고위 관료는 "처음에는 그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지만 예상밖에 공직자 마인드가 있고 국가 방향을 잘 잡아갔다"고 말했다. 당시 이 총리는 주위의 '완장부대'에게 "이제 집권했으니 5도(度)쯤 오른쪽으로 보면 균형을 찾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최근 몇 년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5˚ 오른쪽'의 현실 감각을 강조했던 그가 작년 봄 문재인 후보의 지원 유세에서 "극우 보수 세력을 철저히 궤멸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섬뜩했다. 북한 정권이 대남 비방용으로 흔히 쓰던 말과 닮아 있었다.

얼마 전 평양에서 열린 '10·4 공동선언 기념' 행사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그의 일행 앞에서 "김대중 선생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서 통일 위업 성취에 남녘 동포도 힘을 합쳐 보수 타파 운동에…"라고 연설하자, 이 대표는 다음 날 북한 정치인들과 만나 이에 화답했다. "우리가 정권을 빼앗기면 또 못하기 때문에 제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안 뺏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

우리 보수 진영을 공동의 적(敵)으로 삼고 집권을 절대로 못하게 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1·2차 연평해전 등을 일으킨 북한 정권보다 어떻게 보수 세력이 더 타파의 대상이 되는가. '한통속끼리의 만남'이라는 비판에, 여당은 "구태의연한 색깔론과 시대착오적인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반격했다. 노동신문도 "남녘 땅 곳곳에서 경애하는 원수님을 전설 속의 천재, 소탈하고 예절 바르신 지도자, 덕망 높으신 지도자 등으로 칭송하는 목소리가 그칠 새 없이 울려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해찬은 소위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웠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복역했고,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2년 반 형기(刑期)를 살았다. 그런 그가 북한 세습 독재자의 호감을 사려 하고 북한 주민의 고통에는 외면하는 것은 정말 수수께끼다. 그는 북한인권법 제정 문제와 관련해 "다른 나라의 국내 정치 문제에 깊이 주장하거나 개입하는 건 외교적 결례"라고 주장했다.

분별력이 뛰어난 그에게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역대 최악의 실업률과 고용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는 "지난 10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성장잠재력이 매우 낮아져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어느 정권에서도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런 그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대정부 질문에서 "대통령이 사돈 남 말 하듯이 유체이탈 화법으로 말하면 안 된다. 모든 것을 내가 다 끌어안겠다고 말했어야 한다"고 질타했다. 그의 기준은 왜 이렇게 오락가락한 것일까.

그는 이번 당대표에 출마하면서 "다음 총선에 나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대표직을 끝으로 정치 인생을 마무리하는 걸로 봤는데, 평양에서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안 뺏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했으니 죽을 때까지 정치를 계속할 모양이다. 총선에 안 나오고 아마 대선에 나오는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과 사고 능력을 보여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오락가락하고 오만한 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는 당대표 선거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문 실장'으로 호칭한 적 있었다. 자신이 총리였을 때 문재인은 한 수 아래 비서실장이었음을 은연중에 내비쳤던 셈이다. 한 달 전에는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이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 과 자신이 제시한 '국민성장론' 중 무엇이 옳은지 토론을 벌이자고 제안하자, "격에 안 맞아서 못하겠다"고 했다.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고 '친노의 좌장'인 그에게 어느 누가 격에 맞겠나.

그는 예순 중반의 나이에 7선(選) 의원이다. 그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인간적 성숙도가 깊어졌는지 돌아볼 일이다. 또 잃어버린 '5˚ 오른쪽'도 꼭 되찾기를 바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1/20181011041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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