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혁 논설위원이 본 한·미 외교채널의 현주소
 

임민혁 논설위원
임민혁 논설위원

지난달 말 차관급 인사 이후 외교부 안팎에서 '미국·북핵통(通) 배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이번 인사로 그나마 고위직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미국통들마저 옷을 벗었다. 모든 사안을 미국 중심에서 바라보는 외교부가 과거 정부에서 북한·북핵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들었다는 게 현 정부 사람들의 인식이다. 이 때문에 '북·미 라인' 등으로 불리며 외교부 주류를 형성했던 엘리트들이 지금은 "우린 적폐 아니냐"고 자조하며 몸을 낮추고 있다. 외교부 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교수는 "우리 외교의 근간은 한·미 동맹인데, 이 분야에서 경험과 인맥을 쌓은 인력을 배제하면 외교의 기초가 흔들릴 수 있다"고 했다. 반면 현직 외교 당국자는 "미국만 바라보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 직전인 지난달 17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하루 두 차례 통화했다. 당시 외교부는 한·미 간에 긴밀한 협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아는 복수의 소식통이 전한 내용은 좀 다르다. 폼페이오 장관은 첫 통화에서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남북 군사합의서와 관련해 외교채널 간 정보 공유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폼페이오는 다소 거친 언사로 강 장관을 몰아붙였다. 두 번째 통화는 폼페이오가 자기가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사과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순한 해프닝일 수도 있다. 동맹 간에도 이견은 존재하고 때론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전해준 소식통은 "사전에 실무 라인이 조율을 매끄럽게 했다면 이처럼 한·미가 불필요하게 얼굴을 붉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미 외교채널이 붕괴된 현실의 한 단면이라는 얘기다.

◇미국통 사라진 외교안보 수뇌부

지난달 말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총회 참석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임성남 외교부 1차관, 조병제 국립외교원장 등의 교체를 결정했다. 이들은 북미국, 북핵외교기획단, 주미대사관, 청와대 등을 거치며 커리어를 쌓아온 외교부의 대표적인 미국·북핵통들이다.

반면 신임 조현 1차관은 다자 외교를 주로 해왔고, 이태호 2차관은 통상 전문가다. 조세영 신임 국립외교원장은 동북아국에서 경력을 쌓았다. 이뿐만 아니라 청와대 정의용 안보실장, 이상철 1차장, 남관표 2차장과 미·중·러·일 주요 4개국 대사 중에서도 미국·북핵 전공자는 없다. 우리 외교안보 정책을 좌우하는 핵심 고위직에 대미 전문가가 이처럼 전멸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불과 3년 전인 2015년에 '미국통 편중이 과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극적인 변화다.

당시에는 정통 대미·북핵통인 윤병세 장관, 조태용 차관, 김규현 국가안보실 1차장 등을 필두로 외교부와 청와대에 '워싱턴스쿨 전성시대'가 열렸었다.

하지만 정권 교체 후 이 정무직들은 적폐 청산 수사 대상이 됐다. 정년이 남아 있는 미국통들도 보직을 받지 못하거나 급을 낮춰 공관장으로 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김홍균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정년을 4년 앞두고 대사직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퇴직했다. 장호진 전 북미국장, 조현동 전 주미공사 등은 보직 없이 1년여째 대기 중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사실상 퇴직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현 정부의 뿌리 깊은 미국통 불신

현 정부는 미국통 외교관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 멘토인 문정인 특보는 "그동안 외교부는 사실상 '한·미동맹부'였다"고 했다. 미국이 중요하긴 하지만 외교 라인은 한·미 동맹을 '신앙'처럼 떠받들며 독자적인 사고를 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특히 남북 관계를 한·미 관계에 복속시키는 바람에 북핵 돌파구를 열지 못했다는 불만이 가장 크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명색이 북·미 라인이라는 사람들은 항상 미국 의중을 먼저 살피려 하니까 문 대통령이 답답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북핵통 없는 외교안부 수뇌부
/연합뉴스

현 정부 출범 초기 정부 조직 개편 초안에는 외교부에서 북핵 문제를 전담하는 한반도평화교섭본부를 떼어내 청와대 직속으로 두는 방안이 포함돼 외교부가 술렁였다.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미국통 위주의 외교부를 얼마나 불신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강경화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외교부가 폐쇄적 구조와 4대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대통령의 말은 곧 '대미·북핵 업무는 청와대가 다 할 테니 외교부는 공공외교, 영사서비스 등에 충실하라'는 의미였다"고 했다. 실제로 강 장관은 간부들과의 첫 회의에서 '북핵은 전문가들에 맡기고 외교부는 다른 분야로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한다. 당시 회의에 배석했던 관계자는 "북핵 전문가들은 외교부 밖에 있다는 장관의 인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 꺼내며 동맹 흔드는데, 한국 누구와 논의하나"
美 외교가선 소통 답답함 토로

지난달 24일 뉴욕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당시 배석한 당국자는 "상대방 말에 좀처럼 인내심을 안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내용을 설명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끊지 않고 30~40여분을 경청했다. 트럼프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고 했다. 이 당국자에 따르면 '미국통 배제=한·미 관계 악영향'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

우선 기존의 '워싱턴 외교 문법'을 깡그리 무시하는 트럼프라는 아웃사이더의 등장으로 이전 대미 라인의 경험이 큰 의미가 없어진 데다, 현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달리 '북한 정보'라는 희귀 상품으로 트럼프의 귀를 잡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트럼프 착시 효과'를 걷어내면 한·미 관계에서 불안한 모습이 엿보인다는 우려도 크다. 최근 몇 달 새 개성연락사무소 개설, 북한산 석탄 반입, 유엔사의 남북 철도 공동 점검 불허 등을 둘러싸고 한·미 실무라인에서 잇따라 불협화음이 노출된 것은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동맹 관계에 대한 정교한 이해, 소통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얘기다.

워싱턴의 국무부·국방부 및 싱크탱크 인사들은 '한국과의 채널 부족'에 대한 우려를 숨기지 않는다.

최근 미국을 다녀온 고위 인사는 "워싱턴 조야에서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 같은 동맹을 흔드는 언급을 하는데 이 문제를 한국 누구와 논의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성 김 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는 북한과의 협상을 위해 서울에 올 때마다 정부 공식 카운터파트들 외에 과거 미국통 인사들과 별도로 만난다. "대화가 더 잘 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교부 국장을 지낸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박사는 "북핵 문제든 한·미 관계든 복잡한 실무 단계에서는 전문성을 가진 외교 관료의 역할이 필요하다"며 "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국익의 손실일 뿐 아니라 미측에 불필요한 오해와 불신을 줄 수 있다"고 했다.

美 국무부 위상, 트럼프 취임 후 예전같지 않네

최근 한·미 소통 채널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는 데는 미 국무부의 위상이 과거와 같지 않은 점도 한몫을 차지한다. 미국에서도 백악관과 정보기관이 정책 결정을 주도하면서 국무부가 뒤로 밀리고 있는데, 이 현상이 트럼프 행정부 들어 극명해졌다는 것이다.

8월 말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하는 트윗을 올렸을 때 국무부는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브리핑장에서 대변인이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그대로 중계됐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국무장관이 틸러슨에서 폼페이오로 교체된 후 그나마 국무부 위상이 많이 회복됐다고 하는 게 이 정도"라고 했다.

특히 행정부 출범 2년이 다 돼가도록 국무부 고위직 상당수가 비어 있다는 게 큰 문제다. 우리의 가장 핵심 소통 채널인 동아태차관보 자리도 비어있다. 폼페이오는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의회 인준을 받아야 하는 국무부 고위직의 4분의 1이 넘는 65개 자리가 여전히 대기 중"이라며 "미국 외교가 전 세계 곳곳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틸러슨 전 장관 때는 인원을 8% 줄이고 예산을 27% 감축하는 개혁안이 추진돼 직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0/20181010038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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