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신고 없이 영변시설 폐쇄하면 北 핵무기 규모 알수 없게 돼
강경화 "비핵화에 미·북 서로 불신, 과거와 다른 접근 필요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북한에 대한 핵 리스트 신고·검증 요구를 뒤로 미루자고 우리 정부가 미국에 제안한 사실을 공개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는 종전 선언을 해주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는 북한 측 제안을 사실상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북한 핵 신고·검증은 미국 등 국제사회가 추진해 온 비핵화 핵심 프로세스다. 그런데 이를 잠정 포기하자고 미국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강 장관이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공개한 것은 청와대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향후 북핵 문제의 향방은 크게 달라지게 된다.

미국은 지난달 비핵화 실무협상 장소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을 지목할 만큼 핵 신고·검증을 중시해 왔다. 반면 북한은 이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고, 미국에 종전 선언과 제재 해제를 요구해 왔다. 강 장관의 발언은 우리 정부가 북한의 입장에 더 가까이 서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4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내신 기자 브리핑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 장관 오른쪽은 이태호 외교부 2차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4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내신 기자 브리핑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 장관 오른쪽은 이태호 외교부 2차관. /연합뉴스

강 장관은 WP 인터뷰에서 "과거 경험으로 보면 핵 리스트의 검증을 두고 결론 없는 논쟁(back-and-forth)이 많이 벌어지고 (부시 행정부 시절인 2008년) 세부적인 검증의정서 작업을 하다가 협상이 깨졌다. 다른 접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또 4일 열린 내신 브리핑에선 '핵 신고와 검증은 IAEA나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통상적으로 구축된 절차 아니냐'는 질문에 "지금 과거 다른 나라의 비핵화 과정과 북한의 비핵화가 다른 것은 기본적으로 (북·미 간의) 불신"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신뢰 구축과 함께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는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하므로 신뢰할 만한 상응 조치 없이 비핵화를 할 수 없다'는 북한의 논리와 똑같다.

강 장관은 또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상응 조치를 모두 다 한꺼번에 포괄적으로 고려하면서 로드맵을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핵 리스트를 언젠가는 봐야 하지만, 행동과 상응 조치로 (미·북) 양측에 충분한 신뢰가 생기면 그런 순간이 더 빨리 올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대한민국의 외교 수장이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 굉장히 충격"이라며 "비핵화의 출발점이 핵 신고인데 그것도 없이 로드맵을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관건은 미국이 이런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느냐다. 강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검증을 미루자는) 제안이 미국과도 협의된 내용이냐'는 질문에 "한·미 간에 생각을 꼭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협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미국도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WP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같은 트럼프 정부 내 강경파들은 종전 선언이 북·중에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구실을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종전 선언 서명에 여전히 회의적"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도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을 오랫동안 불평해 온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요구에 개의치 않고 종전 선언에 서명하는 데 열려 있다"고 했다.

11월 6일로 예정된 미 중간선거가 변수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를 의식해 핵 신고를 미루고 종전 선언에 동의하면, 북한에 대한 완전하고 불가역적이며 검증 가능한 비핵화(CVID)의 실현은 물 건너갈 가능성이 크다. 핵 신고·검증 절차 없이 영변 핵 시설만 파괴하면 북핵 개발의 '지문(指紋)'이 인멸되면서 북한 핵무기의 규모를 알 수 없게 된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북한은 영변 핵 시설도 미국의 상응 조치를 보아가며 일부분씩 폐기하려 할 것"이라며 "영변 390개 동의 핵시설을 제대로 검증·사찰하려면 시설 전체에 대한 신고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종전 선언 이후 북한이 딴소리를 할 가능성도 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종전 선언이나 제재 완화를 일단 하면 되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대로 신고·검증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했다.

만약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거절하면 북한이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7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 이후 미·북 회담이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강 장관은 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 "이런 이슈들을 제기해야 할 시점이 있지만 우리가 비핵화에서 진전을 봐야 할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05/20181005002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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