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칼럼
[김기천] 대기업 총수들의 정상회담 들러리
조선  |  @chosu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10.02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김기천 칼럼] 대기업 총수들의 정상회담 들러리

"공화당원들도 운동화를 삽니다."
미국 프로농구의 전설인 마이클 조던이 1990년 중간선거 때 한 말이라고 한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어느 공화당 상원의원에 도전하는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조던은 당시 나이키 전속모델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소신 표명이 나이키 판매에 타격을 줄 가능성을 우려해 중립을 지킨 것이다. 조던이 실제 이런 발언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기업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심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고 있다.

요즘은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기후변화, 불평등, 성소수자 인권, 이민, 인종, 총기 규제 등 정치·사회 이슈에 대해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히고, 행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주주 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에 빗대 ‘CEO 행동주의’ 또는 ‘기업 행동주의’라고 한다.

트럼프 정부 들어서는 대통령에 대한 기업인들의 비판, 쓴소리가 부쩍 늘었다. 예를 들어 정부 출범 초기 7개 이슬람 국가 국민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킨데 대해 골드만삭스 CEO는 "우리가 지지하는 정책이 아니다"고 했다. 스타벅스는 전세계 매장에서 앞으로 5년간 1만명의 난민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었다.

작년에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폭력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많은 기업인들이 트럼프의 미온적인 대처를 비판했다. 대통령 자문위원회에 참여했던 기업인들이 집단 사임해 위원회가 해체되기도 했다. 과거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한국에선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다. 한국 기업인들에게 대통령과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은 절대 금기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별소리 다 할 수 있지만 공개 석상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무심코라도 쓴소리를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권력에 찍히면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부분적으로는 갑질’과 편법 상속, 황제 경영 같은 약점 때문에 기업인들이 당당하게 입장을 밝히기 힘든 측면도 있다. 11개 정부기관의 조사와 10여 차례의 압수수색, 총수 일가에 대한 5번의 구속영장 신청 등 온갖 곤욕을 치르고 있는 한진그룹이 대표적이다. 공권력 남용과 횡포가 분명하지만 어디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관존민비의 낡은 인식과 제왕적 대통령 시스템의 영향이 크다. 김영삼 정부 시절 이건희 회장은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을 했다가 어려움을 겪었다. 대통령이 화를 내고 삼성그룹이 심한 압박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회장의 말에 공감하는 의견도 많았지만 "어디 감히"라거나 "오만하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이 회장은 이명박 정부 때도 "(정부 경제성적표가)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가 결국 사과성 해명을 했다. 그나마 이 정도 발언도 이 회장이니까 가능했다. 다른 기업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억울하고 할 말이 많아도 속으로 삭혀야 한다.

대통령 해외순방에 대기업 총수들이 수행하는 모습은 관(官)과 민(民)의 위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부는 국내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세일즈 외교로 포장한다. 사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통령을 돋보이게 하고, 정상외교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 기업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대기업 총수들을 ‘들러리’, ‘백댄서’로 동원한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대통령 해외 순방 때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기업인들을 동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달라진게 없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08년 미국 방문에 앞서 "총수들은 다들 바쁘고 열심히 돈 벌어야 한다"며 실무진 중심의 구성을 지시했다. 덕분에 4대 그룹 총수가 수행단에서 빠졌지만 그 이후엔 예전 스타일로 돌아갔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대기업 총수들이 대통령을 수행했다. 하지만 관행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 힘든 부분이 있다. 통상적인 대통령 해외순방과 달리 이번 정상회담은 갑작스럽게 결정됐다. 기업들이 일정을 조정하고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분’ 단위로 움직인다고 할 정도로 바쁜 총수들에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일정을 바꾸도록 한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다. 그것도 2박3일씩이나 시간을 내도록 한 것은 권력의 횡포나 다름 없다. 제3세계 독재국가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기업인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못했다.

기업인들의 방북 일정은 거의 무의미했다. 양묘장 둘러보고, 소학교와 평양교원대학 방문하고, 북한 부총리에게 인사하고, 집체공연 관람하고, 백두산에 올랐다. 한 마디로 시간낭비였다. 남북경협을 위한 탐색이라는 포장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렇게 대통령 행차에 번번이 대기업 총수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것도 적폐다. 이제는 청산돼야 한다.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01/2018100102395.html#csidx703b0bf0e4282acbae01c34660e4bf3

조선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  Tel : (02)724-6650,6523  |  E-mail : nkchosun@chosun.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SITE_MANAGER
Copyright © 2013 NK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Contact webmaster for more information